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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기 추모의 밤 초대장
생산과 소비는 하나다 박재일 *이 글은 2003년 11월 박재일 선생이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생산과 소비는 하나다 한살림 운동을 시작한지 어느덧 17년이 됐습니다. 이 운동을 시작하게 된 동기를 먼저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처음엔 어떻게 하면 농산물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소비가 뒷받침 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이 길을 모색하다보니까 농산물 거래라는 게 딱 걸립디다. 시장에 가보니까 도저히 그게 안 된다는 게 느껴진 거죠. 이걸 할 수 있는 일은 도시 사람들과 농촌 사람들이 기존 농사 방식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즉 소비자에게는 어떤 농산물이 공급되어야 하는가, 생산자는 소비자에게 필요한 농산물을 어떻게 생산하고 또 농산물의 정당한 가격 실현은 어떻게 보장받을 ..
좋은 사람들과 맺은 관계가 가장 큰 힘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요즘 무슨 일해요?”부터 묻는다. 나는 “살림해요”라고 답한다. 그러면 더 이상 질문이 이어지지 않는다. 대개 ‘집에서 살림한다’는 말을 ‘일하지 않고 쉰다, 논다’는 뜻으로 생각한다. 사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대답은 “한살림해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살림깨나 한다는 소리처럼 들려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한다. 살림은 ‘죽임’의 반대말이다. 그래서 살림한다는 말은 생활 속에서 무엇이든 온전히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다. 실제로 잘 못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꾸 힘주어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살림하는 나는 하루에 두 번, 모두 다섯 컵의 쌀을 씻는다. 이렇게 해서 한 달 동안 우리 부부와 중학생 두 딸이 집에서 먹는 유기농 쌀이 16kg 정도, 일 년이면..
仁農 박재일 선생의 생애 박재일 선생은 1938년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사암2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 서울대학에 입학한 청년 박재일은 4·19혁명에 참여하고 1964년 굴욕적인 한일수교에 반대하는 6.3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둔 시점에 평생의 반려인 이옥련 여사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민족의 요구에 반하는 한일협정이 비준되고 국민적 저항이 다시 번지자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는 그를 연행해 혹독한 고문 끝에 구속시켰고 신혼의 아내가 첫 아이를 잉태한 채 그를 옥바라지 해야 했습니다. 감옥을 나선 뒤 박재일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만나고 1969년 강원도 원주에 내려가 사회개발위원회, 가톨릭농민회에 참여하며 협동과 자조운동에 매진하며 우리 농업과 농촌 현실을 개혁하고자 힘썼..
“우리 안의 박재일 ” - 인농박재일 선생 1주기 좌담회 시간 : 2011년 8월 18일 오후3시 20분 ~ 5시30분 장소 : 문학의 집 서울 사회 : 이병철 / 후배, 전 전국귀농운동본부 대표, 지리산 마음학교 교장 참석 : 김정남 / 대학동창, 전 청와대교육문화수석 서형숙 / 전 한살림 소비자대표(부회장), 엄마학교 대표 이경국 / 사회개발위원회 동료, (사)무위당사람들 이사장 이길재 / 전 가톨릭농민회 회장, 전 국회의원 장용진 / 전 생협전국연합회 사무총장 정광영 / 한살림 농부 조현선 / 친환경농업단체연합회 회장 최양부 / 전 청와대 농수산수석 사회 (이병철, 이하 사회 ) : 사회를 맡았지만 저 역시 박재일선생을 그리는 한 사람으로 참여했습니다. 1주기를 맞아, 우리 기억이 선명할 때 고인에 대한 생각을 모아보자는 취지로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