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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강연 2011.09.14 17:15 Posted by "한살림답게!" 인농박재일 한살림연합소식

- 박재일 회장이 들려주는 무위당 이야기

 

* 이 글은 2002년 당시 모심과살림연구소 윤형근 사무국장이 무위당 선생과 함께한 ‘원주시절’에 대해 박재일 선생과 대담한 내용으로, <무위당사람들> 소식지에 실렸던 것입니다.

윤형근 : 『나락 한알 속의 우주』나 『노자이야기』와 같은 이야기 속에서 저희 젊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무위당선생님은 생명사상을 실천하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인데요. 하지만 생명사상이 나오기까지는 오랜 활동의 경험과 고뇌가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박재일 회장님께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신용협동조합운동, 농민운동, 원주교구 사회개발위원회의 지역사회개발운동, 가톨릭농민회, 원주소비자협동조합, 한살림 활동 등 무위당 선생님과 보조를 같이 하면서, 무위당 선생님이 나타나지 않고 물러서 계시는 입장이라면, 박 회장님께서는 항상 앞에 나서서 활동을 하셨는데, 그 과정에서의 경험과 고뇌, 그리고 장선생님과 함께 하셨던 과정들을 듣고 싶습니다. 특히 박 회장님께서는 원래는 원주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셨는데, 언제, 어떻게, 왜 오시게 되었고 원주랑 인연을 맺으시게 되었는지 먼저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박재일 : 1965년 무렵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운동 등으로 학원가가 매우 시끄러울 때인데, 김지하 시인의 소개로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되었는데, 그 때 기억으로는 선생님께서 참 편안하고 인자하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주 자연스럽고 포용력 있는 모습으로 맞아 주셨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몇 년 후에 원주로 오게 되었는데, 무슨 운동을 할 목적을 하지고 원주에 온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 일원이 되어 살아보고 싶었을 뿐이었고, 소도시이면서 농촌지역사회였다는 점도 들 수 있겠죠.

4.19혁명과 5.16쿠데타를 거치고 군대 갔다와서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 투쟁으로 옥에 갔다 나오니 학교에서 벌써 졸업이 되어버려 학생 신분이 아닌 거예요. 사회에 나와 직장을 구하기도 어렵고 여러 가지로 활동에 제약이 많았어요. 그래서 고향에 돌아가 몇 년간 농사를 짓게 되었는데, 이 농사라는 게 아무나 짓는 게 아니예요. 나에게 농사를 가르쳐 준 이웃 친구들과 똑같은 시기에 똑같이 씨뿌려 똑같이 가꾼 내 땅에서 자라나는 농작물(배추)이 서로 다른 거라. 나오는 싹이 다르고, 자라나는 모습이 다르고 수확 때의 결실이 달라. ‘야 이거 농사라는 게 그냥 뿌리고 가꾼다고 되는 게 아니구나!’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농사를 지을 역량을 갖지 못했구나”를 절감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정착하지 못하고 있을 무렵, 원주에서 연락이 왔어요. 1968년으로 기억하는데, 장 선생님께서 김지하 시인을 통해서 연락을 주셨는데, 내려와서 보니 당시 천주교 원주교구에서 세운 진광중학교에 교사로 부르신 거라. 자세한 영문도 모른 채 원주로 와서 다음 날, 당시 단구동 종축장 자리에 있던 진광학교로 가서 장화순 교장선생님을 만나 면담을 하고 허락이 되었는데, ‘내게 교단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고민하면서 진광학교에 근무하게 되었어요. 그때 무위당 선생님이 내게 “잘 왔다. 우리 같이 살자.” 하시면서 맞아주시더라고요.

윤형근 : 회장님도 6.3사태 등 학생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시기도 하셔서 상당히 혈기왕성하셨을 때인데, 무위당 선생님과 만나실 무렵 회장님의 사회나 운동에 대한 생각은 어떠하셨나요?

박재일 : 글세, 독재를 반대하고 민주화를 열망했지만, 학교를 떠난 몸이라 무슨 역량이 있어야지, 생각뿐이었지. 그저 열심히 살아보는 수밖에....... 

윤형근 : 처음에는 사회운동이나 이런 것을 목적으로 오신 것이 아니네요. 신협운동, 지역사회개발운동 등의 구체적인 활동들은 언제부터 같이 하시게 되었나요? 

박재일 : 원주에 오기 전까지는 협동적인 삶에 대해서 관심은 있었지만, 협동조합운동에 대해 문외한이었어요.

당시 가톨릭센터에서 무위당 선생님께서 ‘협동조합강좌’를 열고 계셨는데, 학교가 끝난 후 자연스럽게 참가하게 되었어요. 이 협동조합강좌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협동조합운동에 관심과 매력을 느끼게 되었고 민의 자발적 협동조합운동의 일환으로 ‘신용협동조합’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지......

그 당시는 농촌에서 부락 공동기금의 부정한 사용, 장리쌀, 고리 사채 등이 성행하던 시절이라 서민들의 삶이 피폐하고 어려웠던 시절인데, 불신도 극심했었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려운 사람들끼리 십시일반으로 서로 돕고 자립하는 길을 모색하여 함께 살아보자는 이 신협의 정신에 큰 매력을 느끼게 되 거지.

나는 당시 학교에 근무하면서 일과가 끝나면 저녁에 주로 가정 방문을 많이 다녔는데, 학교에서도 권장했지만 이게 아이들 가정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정말 필요한 거야. 밥을 못 싸오는 아이들, 수업시간에 견디지 못하고 조는 아이들, 다 가정을 찾아 다녀보면 그 이유가 있는거라. 이 가정 방문을 다니고 학부형들을 만나면서 가난한 가정들의 실체를 직접 접하고 알게 되었고 아이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

당시 신협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조합원 교육을 철저하게 했어요. 탄탄하고 만만치 않은 교육을 다 마친 후 교육받은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조합 결성 여부를 결정했어요.

또 신협운동을 하겠다는 사람들을 지도하는 자원봉사자가 되려고 해도 교육을 받아야 됐어요. 그래서 협동교육연구원에서 실시하는 21일간의 단기지도자교육을 받았어요. 교육을 받고 자격을 얻어 장상순 씨를 따라 활동을 하게 되었고, 그때 지금 관설동에 있는 세교 신협을 창립하게 되었지. 다 농민들이라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그들과 같이 공부하고 하면서 신협을 준비했지. 그리고 호저면 영산에서도 신협을 만들기도 했고......

그 무렵에 진광학교에 ‘협동교육연구소’가 생기고 장상순 선생이 소장으로 혼자서 그 일을 맡게 되었는데, 이 때 내가 자청을 했어요. 교단에 계속 있는 것보다 이 신협 일이 내 일이라고 생각한 거야. 그래서 교장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협동교육연구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최초로 만든 ‘학교소비조합’의 일도 거들게 되었지. 이게 아마 우리 나라 최초의 학교 소비조합일텐데.

아침에 도시락 하나 싸가지고 나가면, 대중교통인 시내버스 타고 우선 종점까지 가서 다시 시내 쪽으로 걸어내려 오면서, 모내기도 거들고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 얼굴을 익히고, 새참 나눠먹고 막걸리도 얻어먹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협동적인 삶과 협동조합의 필요성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하면서 홍보도 하고 그랬어요.  

윤형근 : 무위당 선생님은 국립서울대 설립안 반대, 도산 선생의 뜻을 이어받은 대성학원의 설립, 1956년 통일사회당/1960년 사회대중당 참여, 중립화평화통일론을 주창하셔서 옥고를 치르는 등 통일운동, 정치운동, 교육운동에 전념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박회장님께서 보시는 무위당 선생님의 정치의식, 통일에 대한 생각은 어떠셨나요? 또 무위당 선생님은 주로 교육에 전념하시면서 뛰어난 의식화 전도사라는 평도 들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박 회장님이 보시는 무위당 선생님은 어떠셨나요?

박재일 : 선생님은 이래라 저래라 하시는 분이 아니셨어요. 가만히 옆에 계시면서도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노력들을 생성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시고, 후배들이 실천해 나갈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해 주신 분이지요.

4.19혁명, 5.16쿠테타, 굴욕적인 한일회담반대투쟁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동기에 분노와 좌절로 몸부림치던 나를 품어준 곳이 바로 선생님이 계신 원주였어요. 선생님과 원주 사람들, 지역사회가 함께 협심하여 자기가 살고 있는 삶터를 좀 더 인간적인 삶이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자발적으로 협동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실천한 것이지.

선생님의 말씀 중에 기억나는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나뉘고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생이 학생이 되기도 하고 학생이 선생이 되기도 하는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관계이다.” 즉 환자와 의사의 관계에서도 의사가 일방적으로 환자에게 시혜를 베푸는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의사를 찾아 온 환자가 ‘어데가 어떻게 아프다’고 의사에게 일러주는 과정에서는 환자가 선생이고 의사는 학생이 되고, 진료하는 의사가 환자에게 이렇게 저렇게 치료해주는 과정, 이때는 의사가 선생이 되고 환자는 학생이 되는 것처럼 다 서로 가르쳐 주고 배우는 상호 작용이다 이거야. 따라서 교육의 본질은 인간다운 삶을 함께 배우고 느끼는, 하나의 공간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의식의 상호 공유 작용이라고 볼 수 있는 거지. 또 전쟁의 예를 들자면 장수 혼자 잘나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많은 병사들이 함께 힘을 합쳐 잘 싸워주기 때문에 이길 수 있는 거라. 그 공을 장수 한사람에게 돌려서는 안 되는 거지. 우리 교육이 특별히 뛰어나거나 잘 난 몇 사람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서로 존중받고 주체적으로,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마음가짐과 인격을 키우는 교육, 서로 협동해서 잘 살아갈 수 있는, 나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교육이 되어야지. 선생님은 그걸 강조하셨어요. ‘의식화’하면 이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이상하게 보는 시대가 있었지만, 선생님은 자기 스스로 옳고 그름을 깨달을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주시고 조언해 주신 분이지. 이거다 저거다 일일이 설명해 주시고 주입하신 것이 아니라 항상 곁에 있으시면서 큰 말씀 없이 우리에게 깨달음의 가르침을 주셨어. 우리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셨지. 어느 누구도 내치지 않으신 분이야. 감싸고 포용하시면서 그 편안함 속에서 옳은 길이 무엇인지를 자기 스스로 깨닫고 실천하게 해 주셨지. 선생님은 진정한 자유와 평화, 그리고 민주적이고 온전한 삶은 통일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점을 늘 일깨워주시고, 인간간, 지역간, 민족간, 나라간 나아가선 인간과 자연간의 조화와 통일을 일러주시곤 했지. 천지(天地)는 내 부모요, 내 안에 천지가 있다는 생각이랄까?

또한 “혁명은 보듬어 안는 것”이라 하신 선생님은 소외되고 가난하고 억압당하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연민의 정이 많으셨고 그들과 함께 하시고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구시지 않으셨나 생각이 들어요. 

윤형근 : 원주의 사회 운동들이 1972년 남한강 유역 대홍수 이후 큰 전환점을 맞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재해대책 사업이 어떻게 전개되고, 이 때 무위당 선생님께서는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요? 

박재일 : 1972년 8월 19일 집중폭우로 강원도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지요. 당시 자료에 의하면 3개도 13개 시군, 87개 읍면에 피해액 187억원에 이르렀지요. 그래서 피해를 입은 수재민을 돕기 위해 천주교 원주교구에서 전 세계에 호소하여 독일 쪽에서 지원이 오게 되었어요. 그래서 원주교구에 ‘재해대책사업위원회’을 구성하고, 어떤 식으로 재해민들을 도울 것인가 정책을 결정하고 실제로 현장에 투입되어 지원사업을 펼치는 집행위원회로 나눠서 지원 사업을 진행하게 되요. 그 때 집행위원회 위원장을 김영주 선생께서 맡게 되고, 이경국 형제가 광산 지역을, 나는 주로 농촌 지역을 맡아서 정인재, 김상범, 홍고광, 박양혁, 장상순 등 여러 분들과 본격적으로 수해 지역 지원사업을 펼치게 되지요. 이것이 내가 농촌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삶을 살게 된 출발이랄까.......

먼저 실태를 알기 위해서 현지조사를 한 후 구체적인 지원방안 등을 세우고 시작되었는데, 몇 가지 원칙을 정했어요. 첫째, 식량 지원이 우선이었지. 농민들이 가을에 수해가 났으니 당연히 그해 농사를 망친 거고 다음해 수확기까지는 먹을 것을 확보하는게 급선무였지. 두 번째는 흙이 떠내려가 황폐해져 버린 농토를 복구하는 사업이야. 농지가 복구되야 다시 농사를 지을 것 아냐. 그리고 세 번째는 농민들의 소득원을 개발하는 문제, 그런데 이 모든 지원 과정에서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수혜가 아니라 재해를 당한 농민들을 그 모든 작업 과정에 함께 참여시켜, 그러니까 자기 몫의 일을 담당하게 하는 거지, 그래서 식량지원사업도 소위 품삯 등의 명목으로 당당하고 떳떳하게 지원받도록 하는거야.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구호가 아니라, 절망에 빠진 그들이 스스로 자립의 의지와 자신감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지. 처음에는 힘든 상황이니까 그냥 도와줄려면 도와주기나 할 것이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한다고 귀찮아하는 눈치도 있었지만 차츰 그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능동적으로 의욕을 가지고 참여하기 시작하더군. 특히 동일한 작목을 할 수 있는 생산협동체를 구성하여 협동 작업이 가능하게 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는 ‘생산협동 조직’을 구성했고, 이런 저런 협동체들이 모여서 마을 총회를 구성하여 마을의 일들을 민주적이고 협동적으로 처리했어요. 그때만 해도 유신 시절이라 마을민들이 자꾸 모이는 것 자체가 관련기관의 주목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농민들은 생각이상으로 자기네들끼리 큰 다툼 없이 대상 분야를 조정하고 결정하는 등 하나의 자율적인 일 처리, 자기 조절 능력을 발휘했어요. 또 생산된 작물, 농자재 등 수송도 문제라, 당시만 해도 운송 수단이 별로 없을 때니까, 수송 수단으로 경운기 지원사업이라든가 또 탈곡기, 건조기 등 시설 등을 지원해서 공동 사용해야 하는데, 그런 기계, 시설 등을 관리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마을민들 중에서 선정해서 일종의 ‘이용협동조직’을 구축하는 거지. 이런 모든 활동들을 현지에서 펼쳐나가면서 한 달에 한번 정도 원주에 모여서 그간에 진행되는 활동 상황이나 결과 등을 서로 보고하고 점검하고 그랬어요. 그런 때도 항상 선생님께서 그 자리에 나오셔서 우리들 얘기를 쭉 들어주시고 했었지. 선생님 계신 자리에서 우리끼리 이야기하고 토론도 하고 하다보면 선생님께서 긴 말씀 안 하셔도 바람직한 방법들을 우리 스스로 찾아나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부락 단위로 이렇게 협동 조직이 구성되고 운영해 나가다 보니까, 기금도 생기고 그것을 잘 관리할 필요성이 대두된단 말이야, 협동 공동체를 운영해 나가는 기금을 만들고 운용하고 관리하기 위해 ‘신용협동조합’의 필요성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거지. 필요한 교육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가면서 주민들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 신용협동조합이 구성되게 돼요. 내가 알기로는 그 당시에 농촌과 광산촌에 대략 74개의 신용협동조합이 창립되었지.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공부하고 고민하면서 신협들을 만들어 가니까 자발적 조직으로 활성화된 거야. 어렵고 가난한 마을민들이 푼돈을 모으고, 또 집집마다 어렵지만 조금씩 조금씩 모아 두었던 얼마 되지 않는 돈이라도 출자해서 신협을 세우고 통장을 갖게 되고 하니까 자부심도 생기는 거지. 당시에 관련을 맺고 활동한 지역이 3개도 13개 시군, 47개 읍면 129개리(농촌), 17개 광업소(광산)이었어요.

또한 농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생활에 필요한 공산품 등의 물자를 외부로부터 사와야 되요. 식량의 생산 공급뿐만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물자의 구입 소비도 함께 이루어지는 거예요, 농촌이나 광산촌의 공산품 가격이 도시보다 20~30% 높았지요. 그래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따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지. 이런 인식 속에서 도시민, 농민이, 그리고 생산자, 소비자를 구분하지 말고 바른 먹거리를 생산하고 바르게 유통하고, 안전한 공산품을 만들고 제대로 공급하고 하는 과정이 전부 구분되거나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다, 이런 생각아래 신협뿐만 아니라 소비자협동조합운동도 진행된 것이지요.

협동 조직의 다양한 형태들, 즉 신협, 소협들 이 중에서 지역의 여건이나 특수성 등의 조건에 의해 전문화된 형태로 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지. 주민(시민)들이 서로 협동하면서 조화롭고 인간적인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이 바로 협동조합운동이예요. 이건 또한 자발적인 민주화 운동이기도 하지. 자치, 자율, 자기조절능력을 갖춘 한 사람 한 사람이 힘을 합쳐서, 일방적인 지원 체제가 아니라 당당한 상호부조체제를 만들어 가는 것이 협동조합의 정신이예요. 마을에 여러 개의 작은 협동체(생산․이용)들이 조직, 운영되면서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조직이 생기고 마을의 모든 일들이 민주적인 회의를 통해서 결정됨으로써 민주적이고 협동적인 마을로 변해갔지. 점차 마을들이 연대해서 횡성 강림지역, 영월 연남지역, 평창 대화지역 등 지역협동운동이 태어나고, 소협, 농촌협의회, 광산협의회 등 보다 광범위한 협동운동으로 발전해 갔지요.

윤형근 : 그 무렵, 민청학련이나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 김지하 시인 사건 등이 복잡하게 얽혀서 참 어려운 시절이었을 텐데, 이 원주의 민주화운동과 재해대책사업은 어떤 관계였습니까?

박재일 : 농촌에서 재해대책사업(나중에 사회개발위원회로 바뀜)이 진행되면서 마을단위별로 농민들 스스로가 민주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다양한 조직들이 생겨났고, 자신감도 형성되었지. 그런데 당시 정부에서 보면 이게 불안한 거라. 마을이나 신협에서 민주적으로 투표하여 대표를 뽑고, 수시로 모여서 작목반회의 등을 하니까 걸핏하면 와서 감시를 하고는 했는데 뭐라고 딱히 꼬투리를 잡기가 어려워서 난감해하곤 했어요. 그런가하면 농민들은 자신들이 심고 싶은 종자를 심으려고 하는데 면에서 나와 일반 벼 못자리를 엉망으로 만들고 일방적으로 통일벼를 심도록 강요하고 하니까 농민들이 반발하게 된 거예요. 결국 이러한 억압적인 강제 등이 개선되지 않으면 안되겠다. 즉 사회의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싹트고 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된거지. 당시에 원주를 중심으로한 가톨릭농민회의 활동은 대단했어요.

한편 광산촌에서도 조합활동 등을 통하여 민주적 의식을 가지게 된 친구들이 앞장서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중에 김지하 시인 등이 참여한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나고 지학순 주교님이 구속되었지요. 상황은 긴장의 극치라고나 할까? 언행일체, 모든 활동이 엄중한 감시 속에서 진행되었지요. 이때처럼 긴장 속에서 나날을 보낸 적이 없어요. 공작적 조작이 난무하던 시대이니까? 그때부터 우리들은 농촌에서는 지속적으로 해오던 사업들을 진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지학순주교 석방을 위한 운동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고 했으니 정부에서도 정신이 없었지요. 동에 번쩍하고 서에 번쩍하니까.

1974년 민청학련 사태를 전후하여 농촌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병행해 가며 상당한 긴장(그게 스트레스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보면 활동가로서의 의무감, 책무라고 할 수 도 있어요)을 늦추지 않고 모두들 열심히 활동들을 했지요. 혼자서 잘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야 내버려두어도 잘 살 수 있지만 약한 자,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기 위해선 서로서로 도움이 필요하거든. 마침 또 나 같은 사람은 이런 저런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고 하는 것이 직업인데 이런 일을 마음놓고 하고 다닐 수 있도록 건실하게 뒷받침해준 것이 집행위원장 김영주 선생이고, 지 주교님이시고, 천주교 원주교구이고, 원주의 많은 분들이었는데 이 모든 일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중심을 지켜나간 분이 장일순 선생이었어요.

윤형근 : 제가 들은 바로는 무위당 선생님이 몽양 여운형의 영향도 많이 받았고, 농민운동가들에게 강의하실 때에는 마오의 모순론을 그렇게 쉽게 강의하시던 분이 없었다고 들었는데... 발표된 자료는 아닌데 , 김지하 시인 인터뷰에는 그 무렵 원주는 농업사회주의를 지향하고도 있었다고도 한 것 같은데 얘기를 들어보면 무위당선생은 무슨 사상을 앞에 세우고 그에 따라 움직였다기 보다는 밑바닥의 일들을 하면서 부닥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사상들을 적용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 같구요. 이런 점에 대해서 박선생님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박재일 : 무위당 선생이 딱히 어떤 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그 분은 다양한 사상과 교감을 나눈 분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아요. 사실 그 무렵에 내가 활동을 하면서 자주 선생님을 접할 때마다 궁금했던 것 중에 하나가 도대체 이 양반은 어떤 주의자일까 하는 것이었는데 통 모르겠단 말이에요. 사람이 어떤 카테고리 안에 잡혀야 이해하기가 쉬운데 이 양반은 잡히지가 않아요. 하지만 행동이나 말씀하시는 데에는 늘상 수긍가는 당위가 있었단 말이에요.

만인의 관계가 교사와 학생이 고정된 일방적 관계가 아니듯이 사상이니 주의니 하는 것과 인간의 관계도 끊임없이 주고받는 관계라고 할 수 있어요. 장일순 선생도 어떤 특정 사상의 추종자라기 보다는 다양한 사상과 열린 자세로 만났던 분입니다. 그러한 만남과 관계 속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끊임없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 분이지요.

당시의 활동에 대하여 농업사회주의라고 보는 분들이 있는데 무위당선생님이 농업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에요. 그런데 1차산업, 2차산업 할 때의 경제학적 의미에서의 농업을 말한 것이 아니라 農 그 자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많이 하였지요. 農은 인간의 삶과 가장 기본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요. 자동차니 건물이니 옷이니 하는 것들은 없어도 불편하기는 하지만 사람이 못살게 되지는 않지요. 하지만 農은 다르단 말입니다. 없어선 안된다는 말씀이에요. 그 무렵에 선생님이 내게 주신 글씨가 食以爲天이에요. 의식주라는 생존의 필수 조건들을 창조해 내는 것이 농업이란 말입니다. 바로 농업은 인간 생존의 근본자리에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농업문제를 바르게 하려는데 많은 관심을 쏟았고, 관련된 사상들을 생각하셨겠지요. 그러나 이 양반은 그러한 사상들을 항상 당신 것으로 소화해내었다고 생각해요.

나는 난 치는 것을 잘 모르는데 선생님의 난을 보면 일반적인 난하고 많이 다르지요. 이게 꼭 사람 얼굴인데 어떤 것은 웃는 모양이고 또 어떤 것은 묵상하는 듯하고 그러잖아요.

윤형근 : 농촌개발사업이 진행과정에서 많은 성과를 남기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려워지게 되었잖아요. 어떤 문제 때문이라고 보시는지요.

박재일 : 두 가지 원인을 말할 수 있겠는데 우선은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는데 교육도 해야하고 사람도 쓰려면 비용이 드는데 수익이 발생되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에요. 협동조합의 경우는 자체적으로 수익을 창조하는 사업을 진행하지만 사회개발위원회는 갈수록 일은 늘어나는데 재정문제를 해결할 제도적 뒷받침이 없었단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정부에서 하고 있는 공공복지사업을 주관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사례가 될 것입니다. 주민들이 민주적으로 참여하게 하고 또한 공정하게 사업을 집행하면서 신뢰를 얻고 했던 과정에서 공공사업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유는 사람문제예요. 농촌개발이니 하는 것도 모두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것인데 일단은 사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요. 그런데 74년부터인가 강원도에서는 사실상 강제이주가 시작이 되요. 예를 들면 화전민 정리가 있는데, 일정 고도 이상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이주시킨 것이고, 그 다음에 젊은 층들이 일을 찾아 공장으로 도시로 옮겨가지 시작했지. 그리고 전국적으로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환경개선사업이 진행되었어요. ‘초가집을 스레트지붕으로 바꾸자’, ‘토담집을 벽돌집으로 바꾸자’ ‘취락구조 개산사업이다’ 뭐 이런 것이었는데 여기에서 정부보조를 받았는데 자부담이 있었어요. 자부담은 그 농가에서 지불해야돼. 가뜩이나 사채, 고리채로 빚더미에 있는데 자부담은 더 큰 부담이 된 것이에요. 그뿐인가? 요즘에도 그렇지만 소를 키우면 소값이 폭락하고 농산물을 생산하면 판로보장이 안되는 거라. 이런 부분들이 정책적으로 뒷받침이 안되다보니 농업을 기반으로 살아갈 수가 없는 거라. 작목반도 만들고 해서 열심히 농사를 지었는데 죽도록 일만하고 소득을 못 올리는 꼴이 된거예요. 부락들이 연결이 되어 신협도 만들고 했었는데 이 부분들이 사람이 빠져나가니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정책 자체가 공업 중심, 도시 중심으로 가니까 농촌이 몰락하는 것이고, 농촌은 산업예비군으로 전락한 겁니다. 도시로 몰린 노동자가 저임금을 받고도 밥만 먹으면 일 할 수 있으니까 밥값을 낮추어야겠고 결국 저농산물 가격 정책으로 일관된 것이지요. 또 농촌에서는 저농산물 가격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증산을 해야 하고, 그러니 농약을 마구잡이로 뿌려야 하고 이게 바로 농업정책이었지.

또 광산촌의 경우는 석유가 주에너지원이 되면서 폐광이 되고 몰락하게 되었지요. 탄광노동자들의 생계가 어려워지고 하니까 동원탄광사건 같은 게 자연스레 일어나게 되었지. 그 당시의 원주를 보면 농촌, 광산 지역운동, 이창복 씨가 참여했던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 거기에 김지하 시인 등의 청년학생들의 민주화운동과 지학순 주교님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의 부정부패 반대, 사회정의 구현을 위한 사회 참여 등이 복합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천주교의 경우도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를 한 것이 이곳이 처음이었어요. 1970년대 천주교 원주교구와 원주는 나라의 민주화와 정의사회 구현에 아주 큰 몫을 했어요. 이것은 원주 시민의 역사적 긍지로 남을 것입니다. 거기에 장일순 선생님도 계셨는데, 우리의 삶의 양식이 제대로 가게 하려는 것이 선생님의 생각이었으니까 당연한 거지.

윤형근 : 그러다가 77년경이지요. “종래의 방향으로는 안되겠다”고 깨닫고 지금까지 해오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생명운동으로 전환하셔야 되겠다고 하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말씀을 들어보니 과거와 단절된 것이 아니네요. 그래도 그 방향 전환이라는 것이 운동을 보는 시각이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 같은데,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박재일 : 다른 부분은 모르고 농업문제만 가지고 이야기를 하자면 농민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억압구조를 깨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관에서 와서 못자리를 짓밟고 통일벼를 심으라고 으름장을 놓고, 협동조합이라는 게 민주적인 곳인데 농협에 강제로 출자를 하라고 강요하지를 않나 도대체가 말도 안 되는 짓들을 마구 하던 때였으니까. 농업이라는 게 생존의 기초인데 농민이 떠나고, 농업이 무너지고 나면 도대체 우리의 삶은 뭐가 되느냐 말이야.

그런데다 농업이 경제가치에 종속되다 보니까 비료, 농약 때문에 농토가 망가지고 환경이 파괴되고, 농민은 농약에 중독되고, 농산물이 독성에 오염되니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지. 사실 초기에는 기존의 농민운동적 시각에 따라 농민의 사회적 권익을 회복하기 위하여 억압구조를 깨야겠다는 생각에 머물렀는데 무위당 선생과의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그것만으로는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에요. 사회, 사물들 속에 있는 상생의 관계를 기초로 세계를 보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보게된 것이지요. 그 다음부터는 사회적으로 어떻게 이런 시각에 기초한 관계를 형성해 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딱히 생태농업을 하겠다는 생각이라기보다는 공동체성에 기초한 전통적인 농업의 원리에 의거하고, 그 안에 경제가치가 아닌 생태적 가치를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여기에 도시와 농촌이 협력과 연대를 통해 함께 가는 새로운 운동방식을 고민하게 된 거지요. 그리고 일본의 생협활동들에서도 많은 생각의 단초를 얻었지요.

도시와 농촌의 연대, 생산과 소비의 협력관계를 고려하면서 농산물 직거래운동, 유기농 직거래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런 운동을 무어라 칭할 것인가 고민이 많았어요. 원주에서 시작할 때는 협동조합이라고 했는데 일반적인 협동조합적 개념으로는 이상한 양식이지요. 생산자와 소비자가 모두 조합원이라, 조합원의 생활영역이 다른데...... 문제는 서울로 갔을 때인데 원주만 해도 밝음 신협도 있고 작은 지역이라 협동조합을 하기가 쉬웠는데 서울에서는 협동조합 만들기가 워낙 방대한 지역이라 어려운 문제였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공감하고 이런 내용을 담아낼 적절한 용어를 고민하던 중에 ‘한살림’이란 용어가 떠오르더군요. 한살림이 어떠냐고 하니까 장일순 선생님과 김지하 시인도 좋다고 하더군요.

인간의 심성은 메말라지고, 공동체성이 붕괴되고, 마음은 갈가리 찢어지고, 사람들은 돈, 물질, 과학기술의 맹신자가 되고, 생태․환경․자연파괴 등 온 상이 황폐화되고 있는데, 이는 물질주의적 산업문명이 이룩한 산업사회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의 근본적인 전환이 없는 한 인류의 건강한 미래를 바랄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선생님은 현대 산업문명의 문제와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인 문명 창출이 필요하다고 여기시고 생명운동으로 그 길을 잡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윤형근 : 원주 때와는 달리 허허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제기동에 쌀가게였던 한살림농산을 내시고, 일반 쌀가게도 아니고 쉬운 일이 아니어서 힘이 많이 드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때 무위당 선생님이 힘이 많이 되셨을 것 같은데..... 제 기억으로는 박 회장님이 힘든 일이 있으시면 늘 원주에 내려가셨지요.

박재일 : 1986년 6개월 정도 준비를 하고 서울에서 농산물을 도시소비자들에게 공급하기 시작한 것이 그해 12월 4일이었지요. 한살림농산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쌀가게를 시작한 거죠. 이 일을 시작하면서 같이 농민운동 했던 친구들, 노동운동 하는 친구들, 교회 분들 하고 상의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그 분들은 꼭 필요한 일이기는 한데 성공하기는 힘들 거다, 고생길이니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대부분의 반응이었어요. 그런데 선생님과 원주 분들과 의논을 해보면 그건 꼭 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성공을 전제하지 말고 해야 할 일, 필요한 일이니까 꼭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물론 고생길이 훤하니까 안타까워는 했지만, 해보자고 용기를 주시는 거예요. 그에 힘을 얻어서 겁없이 시작했어요. 농업도 제 모습으로 회복시키고, 농촌도, 농민도 긍지를 가지며 살고, 도시 소비자들도 건강한 밥상을 차리면서 농촌과 도시가 삶의 연대, 생활협동 관계를 만들어보자고 <한살림을 시작하면서>라는 취지문 한 장을 갖고 우리 사회에 얘기를 걸기 시작한 것이죠.

그때 우리 사회는 엄청난 격변기, 민주화를 위한 노력들이 거세게 이어지던 때 아니었어요. 그러니 서울 바닥에 올라와 쌀자루를 지고 석발기를 돌리는데, 몸과 마음은 길바닥을 향하는 거예요. 정작 소비자는 찾아오지 않고, 친구들이 찾아와서 지금 나라 일이 급하니까 이것부터 해결하고 나중에 한살림을 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소주도 많이 먹고, 문을 나섰다 이게 아니지 생각하고 돌아오곤 했어요. 어려움도, 갈등도 많았지.

그럴 때마다 내가 찾아갈 곳이 어디겠어요. 원주에 내려가서 선생님한테 하소연을 할 수밖에. 내가 잘못 시작한 게 아닌가 하고...... 그런데 선생님은 많은 말씀을 안 하세요. 특히 선생님과 내 경우에는 그랬어요. 또 직설적으로 말씀도 안 하셨어요. 그저 대포집, 선술집에 가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내 고민이 저절로 풀려버리는 거야, 이 방향으로 가야겠다, 이 문제는 이렇게 대처해야겠다는 게 자연스럽게 나온단 말이지. 이것이 아직도 풀리지 않는 무위당 선생님의 신비예요.

선생님 말씀 중에 기억나는 것은 사람도 안과 밖이 분리되어 있는 건 아닌데, 있기는 있다는 말이지, 이 안팎의 조건이 형성되지 않고는 일이 이루어질 수 없다, 상황, 조건, 여건이 조성이 되어야 일이 된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느긋하게 생각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선생님이 내 과거를 잘 아시니까 서울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화운동 쪽으로 가버리면 절대 돌아올 수 없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죠.

그리고 지금까지 원주의 경험들을 원용을 해라 하셨어요. 바로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함께 일을 논의해 나가는 경험 말이죠. 마을에 가서 어떤 일을 할까, 어떤 방법으로 할까 계획을 세워 스스로 협동체를 구성하는 데까지 어떤 마을은 6개월도 걸리고, 어떤 마을은 한두달 걸리지만,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경험이다. 협동조합도 마찬가지고... 서울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야 하고 그런 사람들과 논의를 해나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일이 당위로만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원주의 경험을 살려 사람들을 만나고 분위기를 형성하면 일이 좋은 형태로 발전될 수 있지 않겠느냐, 기반이 형성되지 않은 곳에 가서 아무리 안타까워하고 조바심을 낸다고 해서 일이 되는 게 아니라고 격려하셨죠.

윤형근 : 무슨 일이나 마찬가지지만 한살림의 처음 시작은 황무지에 나무를 심는 기분이셨을 것 같아요. 그래도 사회적으로 인식이 확산되고 한살림에 대한 이해가 넓혀지면서 운동의 지평을 넓히고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박재일 : 그때는 동료나 후배, 선배들이 하나둘씩 찾아주고 같이 한두시간 이야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었죠. 서울에서는 농촌이 어떻게 되어가고, 매일 대하는 밥상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생각들을 하지 않았어. 기회 있을 때마다 내가 몸으로 겪어왔고, 보아왔던 우리의 농사를 짓는 방식이나 우리의 삶의 모습들을 이야기하니까 듣는 사람들은 기절초풍을 하는 거야.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들과 만났죠. 세월이 가면서 관심을 가져주고 한 살림 운동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가니까 참 반갑더라구요.

그런데 이 일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정말 필요하고 소용되는 일이라면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필요로 하는 사람들 스스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관심있는 분들과 같이 협동조합을 만들게 된 것이죠. 1987년부터 뜻을 가진 소비자 분들이 준비를 했어. 그때까지 제기동 쌀가게 한살림농산을 거쳐간 사람들이 1500여 명 정도 되는데, 그 분들에게 협동조합을 만들겠다고 소식을 전해 1988년 4월 21일 70여 명의 조합원들이 모여 한살림 공동체소비자협동조합을 창립했죠. 한살림이 생활협동운동 틀을 갖게 된 의미있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생존의 필수조건인 농을 생태적이고 협동적으로 살려내어, 그 농산물을 농촌과 도시의 생활자들이 같이 연대해서 본격적으로 만들어가게 된 것이죠. 도시의 생활자들은 유정란 하나를 먹으면서도 건강한 밥상을 위해 애쓰는 생산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고마워하고, 또 생산자들은 소비자들이 안심하고 밥상을 차리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 농사짓고 생산하는 것에 보람을 느끼게 된다 말이죠. 구체적으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소재로 해서 서로 고마워하면서 생활이 달라지고 또 이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게 된 것이죠. 게다가 좋은 것 먹게 된 것을 그저 고마워만 했는데, 이 일을 통해서 논이나 밭, 물 등 생태계가 살아난다는 것도 알게 되고....

한편 무위당 선생님과 주변 사람들이 힘이 되어주셨던 것이 농촌과 도시가 서로 나누는 운동이 기본이지만, 이 운동이 단순히 물건을 나눠먹는 차원에서만 그쳐서는 안되고, 우리의 생각과 관계의 내용을 바꾸는 것으로 가야 한다, 이야기를 나눈 것이었어요. 그래서 사회 전체가 서로 나누는 삶을 지향하는 길을 가야 하지 않으냐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살림연구회를 꾸려 1년 여 준비를 해서, 1989년 10월에 한살림모임을 창립하고 우리 운동의 지향과 내용을 밝힌 한살림선언을 발표했죠. 그게 큰 힘이었어. 자네도 거기 참여했지만.... 한살림농산이나 조합이 재정이 탄탄했다면 이런 일을 펼쳐나가는 데 뒷받침이 될 텐데..... 그게 아니더란 말이지. 심지어 무위당 선생님이 난 전시회를 열어 뒷받침을 하시는 등 큰 힘이 되어주시기도 하셨지. 모두가 모여서 같이 생각을 정리해서 우리 모두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방향과 지침을 선언에 담았지. 사회에 대해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이렇게 살자는 거였어요. 지금도 그게 지침이란 말이지. 아마 영원한 지침이 되리라고 난 생각하는데....

윤형근 : 어려움,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역사적, 사회적인 요구가 있어서 오늘 이렇게 어느 정도 기반도 갖추고 회원도 3만이 넘을 정도까지 갔는데..... 한살림모임 말씀도 하셨지만 무위당 선생님의 생각에 비추어보았을 때, 지금의 모습을 생각할 때 더 강조하고 더 해나가야 할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박재일 : 그 이야기하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어요. 무위당 선생님이나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여러 사회문제들의 원인이 무엇이냐, 사람을 존중하고 서로 관계를 회복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것이 독재 때문이냐, 그러면 민주화가 되면 해결되느냐, 독재와 관계 없이도 사람이나 마을이 다 찢어지는데.... 그러면 분단 때문이냐, 탄압 때문이냐, 가난 때문이냐... 그런 것들이 부분적인 이유는 될 수 있겠지만 그것들이 다 해결된다고 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삶과 사회가 되느냐, 이것이 우리 모두의 고뇌였어요. 이건 문명이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 결과 아니냐, 그럼 앞으로 이 문명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었지.

기술공학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을 거예요. 가령 엄청나게 쏟아지는 쓰레기를 기술공학적으로 처리하는 것에도 노력을 해야할 거예요. 하지만 결국 쓰레기를 줄이거나 발생시키지 않는 사회, 삶이 도모되지 않고는 세월이 갈수록 인간의 생명도, 생존조건도 더 심각하게 위협받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이것을 풀어내는 길은 보다 근원적인 데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에요. 무위당 선생님이 하신 말씀 중에 기억나는 것이 ‘원시반본(原始返本)인데, 근원적인 데서부터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자는 입장, 모색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차원에서 앞서 얘기한 것처럼 한살림이 초기에는 멋진 모습으로 나타났어요. 한쪽에는 생명을 존중하는 새로운 가치나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한살림모임이 창립되고, 또 한편에서는 우리 생존의 필수조건인 농을 살려나가면서 협동적으로 생산되는 농산물을 농촌과 도시의 생활자들이 같이 연대해서 만들어가면서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새로운 가치와 삶을 실천해 나가는 생활협동운동이 전개되었잖아요. 제 역할들을 해나가며 생각을 정리하고 실천을 하면서 지금 사회가 재미없다 생각했는데, 이 사회가 이렇게 되어야겠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게 재미있구나, 이런 생각과 삶의 모습들을 키워낼 수가 있었는데.....

그런데 한살림모임이 유지될 수 없어서 그걸 접었을 때 선생님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안타까워했지요. 물론 농촌과 도시의 나눔을 하면서도 모임의 부분들을 보충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생활협동운동에 전력투구하다 보니 쉽지 않았지요. 새로운 안목에서 현재 우리의 삶을 재해석하고 할 일들을 모아내고 이런 것들을 활발하게 개척해야 하는데...... 한살림모임이 유지되었다면 서로간에 큰 보탬이 되었을 텐데... 어느 면에서는 균형이 안 맞았다고 볼 수 있죠. 그게 항상 안타까웠는데...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기반이 구축되었으니, 노력을 해보자 하고 있어요. 이제부터는 잘 되지 않겠느냐 생각이 들어요.

윤형근 : 한살림모임 막바지에 제가 간사를 하다 그만두겠다고 하니까 무위당 선생님이 붙잡으셨는데.... 아마 그 일이 다시 시작되는 걸 아시면 무위당 선생님도 기뻐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짖굳은 질문일지 모르겠는데, 무위당 선생님에게 서운하신 때는 없으셨나요.

박재일 : 왜 없었겠어요. 재해대책 한참 바쁠 때는 정신없었고, 원주에 이런저런 일들이 터졌을 때, 선생님에게 출마를 하시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씀 드린 적이 두어번 있었어요. 현장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일이 안 되니까.... 지역개발 사업을 위해 갖은 고생 다했는데, 가령 소를 2년 동안 잘 길렀는데, 한우 가격이 폭락해서 소득으로 연결이 안 된다 말이지. 농산물 가격지지 정책만 제대로 된다면 힘을 받을 텐데, 그렇지 않다는 말이죠. 이건 정치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적 역량을 갖춰야 하지 않나 생각을 많이 했어요. 게다가 원주는 꽤 기반이 구축되어 다른 곳에서는 ‘원주민주공화국’이라고까지 했단 말이지. 그래서 선생님에게 출마하시라고 했더니, 막 화를 내시더라구. 너는 아직도 생각이 그것밖에 안 되느냐고 하시면서..... 그러니까 젊은 사람은 화가 나지, 답답하고..... 그래서 원주를 떠날 생각도 했었어요. 게다가 선생님은 다 끌어안으면서 가시는데, 도저히 그래 가지고는 일이 안될 것 같았거든....

윤형근 : 정치문제에 있어서 선생님이 거리를 두셨던 것은 혹시는 개인적으로 과거의 실패가 한 요인이 아니었던가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박재일 : 선생님 개인적으로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지. 우선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시지 않으신 것은 사회안전법이라는 정치적 제약이 있었고, 두 번째로는 정당정치 면에서는 진보나 새로운 세력이 발붙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이 몇 사람 앞장서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거였어요. 뿌리를 박고 사는 생활인들이 하는 삶의 운동이 되야 하지 않겠느냐, 이게 아니고는 길이 없다라고 선생님은 보신 것 같아. 그래서 내가 뜨려고 하면 주저앉히고, 주저앉히고 하셨던 것 같아요. 물 속에 잠수해서 기어라고까지 말씀하시면서.....

선생님이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러셨느냐, 아니에요. 지난 소식지에도 나왔지만 공무원이면 공무원이 할 수 있는 일, 관청에 찾아오는 민초들을 친절하게 자상하게 보살피는 일을 일러주셨지요. 사람에 맞게, 분야에 맞게 오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들려주실 얘기가 있었어요.

윤형근 : 박 회장님은 주저앉히셨지만, 무위당 선생님께 정치인들도 많이 찾아오셨지요.

박재일 : 그랬지요. 따뜻하게 맞아주시는 것은 기본이었지요. 원래 삶의 기본이 그러셨으니까요. 계산을 하거나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일러주시고, 잘한 일이 있으면 등을 두들겨주시고.... 이런 것들이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었지. 선생님이 소용된다면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다 한 셈이죠. 원주 봉산동에 계시면서 모든 운동을 하신 것이지.

윤형근 : 마지막으로 무위당 선생님을 기리는 모임에 바라는 얘기를 들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박재일 : 우선 젊은 후배들이 모여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니까 고맙고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리는 모임은 다른 기념사업회 등과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선생님을 선전하거나 알리는 것이 아니라 무위당 선생님의 생각, 바라시던 삶의 모습, 사회적인 관계, 사람이나 사물을 대하는 모습들을 생각하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할 거예요. 그리고 그런 귀한 생각을 사회에 전달하는 역할도 필요하겠죠. 사람들이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 모색하는 데 힘이 될 수 있게 말이죠.

오늘 내가 선생님에 대해 얘기는 했지만, 이건 선생님의 한 부분일 거야. 장님 코끼리 만지기를 한 것이지. 무위당 선생님과 함께 하셨던 여러분들과 온전한 선생님의 생각과 모습을 찾고 나누는 일이 필요할 거예요. 그런 것들이 정리되어 책으로 엮어졌으면 해요.

이전에 이영희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무위당 선생님의 족적이 담긴 소박한 기념관이 만들어졌으면 해요. 봉산동이라도. 함께 모여 담소도 나눌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거창하게 할 필요는 없어요. 그저 선생님의 모습대로....

윤형근 :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며칠을 두고 들어도 다 듣지 못할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회장님이 지금 하시는 일 속에 무위당 선생님이 살아계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일이 제대로 되어간다면 아마 선생님도 기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장시간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우리 안의 박재일 ” - 인농박재일 선생 1주기 좌담회

행사 2011.09.14 16:17 Posted by "한살림답게!" 인농박재일 한살림연합소식

시간 : 2011년 8월 18일 오후3시 20분 ~ 5시30분
장소 : 문학의 집 서울

사회 : 이병철 / 후배, 전 전국귀농운동본부 대표, 지리산 마음학교 교장
참석 :
  김정남 / 대학동창, 전 청와대교육문화수석
  서형숙 / 전 한살림 소비자대표(부회장), 엄마학교 대표
  이경국 / 사회개발위원회 동료, (사)무위당사람들 이사장
  이길재 / 전 가톨릭농민회 회장, 전 국회의원
  장용진 / 전 생협전국연합회 사무총장
  정광영 / 한살림 농부
  조현선 / 친환경농업단체연합회 회장
  최양부 / 전 청와대 농수산수석

사회 (이병철, 이하 사회 ) : 사회를 맡았지만 저 역시 박재일선생을 그리는 한 사람으로 참여했습니다. 1주기를 맞아, 우리 기억이 선명할 때 고인에 대한 생각을 모아보자는 취지로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가 살아온 생애, 그가 뜻을 품고 살아온 일 가운데, 같이 일 해 온 동지, 벗들을 모시고 그의 생애에 대해, 같이 일을 했던 벗들로서 편하게 말씀을 나눠주셨으면 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박재일 선생은 학생시절부터 일관되게 운동가, 실천가의 삶을 살아왔으며, 새로운 차원의 운동인 한살림운동을 시작해 생협운동 협동운동, 유기농운동 생명운동의 새지평을 열었습니다. 여러 시기마다 같이 일해 온 분들을 모실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새삼스럽게 소개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이경국 선생은 원주시절에 가장 가까이서 함께 활동해왔습니다. 그 시절 말씀을 들려주시겠습니다. 장용진 선생은 생협전국연합회 사무총장이셨으니 그  이야기를, 엄마학교 대표이시기도 한 서형숙 선생께서는 초창기 한살림조직을 일구는데 함께 기여하신 분이고, 소비자대표로서 한살림을 가장 잘 소개해주신 분입니다. 최양부 선생님은 문민정부 당시 청와대 농수산수석으로 계시면서 유기농운동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정책적인 뒷바라지를 해주셨는데, 친환경농업법 제정과정 등에 관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부분에 대해도 말씀해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길재 선생은 고인과 가톨릭농민회 운동을 오랫동안 같이 해온 분입니다. 당시에는 낮에는 회의하고 밤부터 새벽 서너 시까지 술 마시는 일이 기본이었는데, 그 당시 이야기를 해주시겠습니다. 조현선 회장은 환경농업단체연합 회장이시고, 환농연과 가톨릭농민회에 대한 말씀을 해주시겠습니다. 정광영 선생은 가톨릭농민회가 생명운동으로 전환한 뒤 누구보다 열심히 그 뜻을 실천해오셨습니다. 한살림 생산자로서 나눠주실 말씀이 많겠습니다. 김정남 선생은 고인의 학생운동 시절을 회고해주시기에 적합한 분이라고 여겨집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편안하게 학창시절, 원주, 가농, 한살림 소비자 생산자, 생협중앙회, 최양부선생 차례로 연대순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제가 중간에 말씀드릴 게 있으면 그렇게 하면 좋겠는데 어떻습니까.

밤새 이야기해도 모자라겠지만, 다음 일정에도 합류해야 하니, 돌아가면서 6~7분 정도씩 나눠서 말씀을 해주시고 다른 분들 말씀하실 때 함께 거드는 식으로 했으면 합니다.

먼저 김정남 선생님 말씀을 듣기로 하겠습니다.

김정남 : 가족들께는 보내드렸습니다만, 《공동선》이라는 잡지에 박재일 선생의 삶과 실천에 대해 5~ 60매정도 되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오늘 참석자 가운데는 제가 제일 먼저 만났습니다. 박재일 선생은 시골 출신인데다 전쟁 등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졸업이 늦었고, 경북고등학교 진학도 늦었고 서울대학교에 1960년에 들어갔는데 동기들보다 세 살 정도 많았습니다. 아마 추측하기에 입학한 지리학과가 제2지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경상북도 대구 쪽에는 지리산에서 내려온 사람들도 있었고 혁신그룹이 많아 대구 사람들이 정치학에 대한 지망이 아주 강했습니다. 우리 동기들 가운데 현승일, 김중태 등이 있었는데, 당시 정치에 대한 갈망이 많았던 것 같고 박재일 씨도 아마 정치학과를 지망했던 것 같습니다. 조용하고 뚝심 있어보였으나 앞에 나서는 유형은 아니었습니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 시위 때도 참여해 도피를 하기도 했습니다만, 1965년 한일협정비준반대 투쟁 때는 주모자로 깊이 관여해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그때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습니다. 아버지는 박근창이라는 분으로, 서울에 자주 오셔서 아들이 사는 하숙집도 돌아보시고, 아들을 굉장히 사랑하고 장하게 생각하신다고 느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그 때는 구금시설도 모든 게 원시적인 수준이었죠. 구멍이 뚫린 유리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우유를 사가서 어떻게든 안에 있는 사람에게 먹이려고 노력하고 그랬습니다.
부인되는 이옥련 씨는 그 당시 결혼은 했지만, 장가만 갔지 시집을 안 온 상태였습니다. 처가에서 결혼을 올리고 조금 지나 신행을 하던 풍습이 있었으니까요. 아주 현숙한 분이었습니다. 남이 봐도 저렇게 신중하고 침착할 수 있나 싶도록 옥바라지를 했습니다. 그러고나서 풀려난 뒤에야  시집을 오시게 됐습니다. 결혼식때 저는 못 갔지만 김지하 최해성 송철원, 이런 친구들이 참여했습니다. 아주 짓궂게 신방을 훔쳐보고, 동네 술을 다 마시고 애를 먹였다고 합니다.

감옥에서 나온 뒤에는 금호동 비탈집에 세를 얻어 어렵게 살았습니다. 큰 애 순원이가 태어난 뒤 입니다. 그 당시 대학을 졸업하면 대개 교수, 기자 이런 게 전망인데 박재일씨는 반공법 위반으로 감옥에서도 빨간 딱지를 달고 있었고, 나와서도 신원조회 때문에 취직도 안 돼, 어쩔 수 없이 상당 기간 놀다가 나중에 신민당 부총재를 한 이기택이라는 사람이 국회의원이 됐는데 그 사무실에 몇 달 나갔습니다. 이기택이라는 사람은 자기 매형인가가 큰 회사를 가지고 있어 돈이 많았고, 그런 배경으로 국회의원이 돼 큰 비서실도 꾸미고, 말하자면 박재일씨가 ‘영포라인’ 이라서 (웃음) 이기택과 연결 돼 그 사무실에 잠시 나간 적이 있습니다. 이런 데가 박재일 씨에게는 전혀 안 맞았습니다. 당시에 젊을 정치인 이기택, 김상현이 둘 다 야망을 품었죠. 조홍규 이런 이들이 보좌진을 하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근근이 생활하다가 원주로 내려갔습니다. 김헌일이라고 하는 친구는 경기고 나와서 서울상대 1등으로 들어갔던, 알아주는 천재였는데 신설동 살던 그 친구가 대학 들어간 뒤 너무 착하고 선량하고 그러니까, 사회적 규범을 못 따라가고 그런 면이 있었는데 박재일 씨와 같이 원주로 갔습니다. 그때 원주에는 지학순 주교하고 장일순 선생이 야심차게 대 사회선교를 하려던 참인데, 김지하가 천거하고 장화순 장일순 선생이 이들을 받아주었습니다.

1972년, 남한강 일대에 수해가 난 뒤로는 학교 교사가 아니라 재해대책위원회와 사회개발위원회 등에서 활동을 해왔습니다.
박재일 형은 운동가라기보다는 맡은 일을 가장 확실하게 꾸준히 지치지 않게 해내는 실무형 인물이었지, 앞서서 일을 저지르는 형은 아니었다고 여겨집니다.

사회: 저도 고인과 가까이 지내기는 했습니다만, 처음 듣는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시간 여유를 가지고 이런 이야기는 깊게 들어서 기록으로 남겼으면 합니다. 나중에 별도로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원주시절로 넘어가서, 가장 가까운 벗으로 술친구이기도 했던 이경국 선생 이야기를 들었으면 합니다.

이경국: 박재일씨가 1969년에 원주 진광중학교 영어선생으로 왔어요. 장일순 선생이 좋은 친구가 있으니 소개해주겠다고 해서 만나 술을 한 잔 마시니 이거 술이 통해요. 그 다음부터 선생님 너희 둘이 벗으로 지내라고 해서 그랬어요. 김지하는 나에게 형이라고 하는데, 지하랑은 대학 동기니까 어정쩡하단 말이야. 그런데 장일순 선생님이 “재일이가 너와 나이가 같으니 친구로 지내라.” 하셔서 그 뒤로는 “재일아, 경국아” 이렇게 지낸 게 60년대 말부터 40년 세월이 갔어요.

원주에 와서 제일 먼저 무위당 선생을 만나서, 진광중학교 영어 선생님을 했는데 영어선생 스타일은 아니야. (웃음) 어떤 때는 술이 덜 깬 상태로을 수업을 들어가기도 했어요. 성격은 내성적이야. 평소에는 말을 안 해. 가만히 잘 듣고,  술이 들어가면 속내를 털어놓곤 했어요. 시내에서 술을 1차 2차를 마시고 3차에는 꼭 자기 집으로 가는데. 둑방 끝에 있는 논배미 아무도 없는 들판에서 “박정희 이 새끼 나와” 그러더라고. 박재일은 심지가 굳은 사람이었지만 내성적인 면이 강했어요.

1972년도 남한강에 수해가 나면서 나는 나대로 불려가고 박재일은 박재일대로 진광중학교 선생 하다가 불려가서 ‘재해대책위원회’ , 나중에 ‘사회개발위원회’가 구성돼요. 농촌에는 6명을 가라고 하는데 광산촌 광부들한테는 나 혼자만 가라고 해요. 다 무위당 선생을 따랐으니까 그러려니 했죠. 재일이하고 내가 제일 먼저 특별한 관계가 된 것은,  회의가 끝나면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아요. 대폿집을 안 들를 수 없어 술 한 잔 먹으면서 나는 광산에서 힘든 일, 자기는 농촌에서 힘든 일을 나눠요. 현장의 일이라는 것이 참 무궁무진해. 농민들을 만나야 하는데 좀처럼 마음을 안 열거든, 광산에 있는 광부들이 마음을 열어요? 인생막장이던 사람들이? 가서 협동조합하자고 하니 미친놈들 헛짓 한다고 했지. 그 때 지학순 주교님이 독일에 낸 프로젝트로 많은 돈을 받아서 반드시 사람들에게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준 거지, 그냥 돈을 퍼주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협동운동을 결성해서 소도 사게 해주고 신용협동조합도 만들고 소비조합도 만들고 그런 일들을 초창기부터 해왔어요. 그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런 일을 1970년대 부단히 하면서 한 가지 고마운 건 한 달 출장을 다니면 저 같은 경우는 광산지역이 너무 커서 한 달 평균 25일 출장을 다녔어요. 오면 일 주일 동안 회의를 하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다 합니다. 일주일 동안 평가하고…진저리가 나게 했죠. 그런데 그 때 항상 장일순 선생님이 계시고, 초창기에는 김지하도 참석하고 김영주 회장도 꼭 참석하고, 일주일동안 회의가 끝나면 마지막에 종합을 해서 김지하하고 장일순 선생님이 방향을 이렇게, 저렇게 잡는 것은 어떠냐? 그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줬어요. 그런 걸 그 이후로 10년을 했어요. 회의를 통해서 평가하고, 분석하고, 반성하고 그 다음 계획을 세우고 이런 일을 반복하면서 점진적으로 농촌이 변화되고 농촌이 발전되고 그 변화하는 과정을 박재일 회장은 특별히 더 깊숙이 구체적으로 많은 것을 습득하려고 노력했어요. 그 과정에서 1973년부터 가톨릭농민회에 적을 두고 일을 병행하면서 사회개발위원회 일을 같이 했어요.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그때, 장일순 선생님, 김영주 회장, 돌아가신 지학순 주교님이 재일이가 가톨릭 농민회 일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해준 것 그거는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겨야 돼. 농촌현장을 매일 못 가고 가톨릭 농민회 일에 매달려 오원춘 사건, 함평고구마 사건에 대해 집중할 수 있게 박재일의 부담을 딴 사람이 지켜줬다. 그것은 동지애나 우애가 아니면 안 되거든. 그런 과정을 참 많이 겪었어요.

박재일 회장은 가만 보면 회의 끝나고 대포 한 잔 마시다 “광산에 말이지. 농민들이 생산한 걸 납품할 수 있는 방법이 없냐?” 그럼 내가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해요. 그 때 광산촌에서 제가 소비자신용조합 15개 인가를 내고, 그 다음에 어려운 과정을 거쳐요. 박재일 회장이 그 때 농촌의 신용협동조합 50개 이미 인가를 냈어요. 이 다음에 소비자조합을 만들어 주고, 그런데 문제는 농민 생산자 물건을 팔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15개 점포를 내고 광산에는 광부들과 사적인 관계가 다 따로 있기 때문에 직접 못가도 거리가 먼 곳에 지점, 분점 등을 50개 냈어요. 광산에 제가 소비자조합을 만들어 직거래를 한 뒤에 전체 광산의 물가가 35% 다운됐어요.

그때 농민 생산자들이 농사지어 직거래할 수 있는 유일한 게 배추였어요. 배추농사. 그래가지고 박재일회장하고 나하고 연구해서 여주, 장호원 제천 쪽에서 계약 재배해가지고 트럭으로 50차, 30차씩 싣고 가요. 해발 1천미터 지역에 가면 기후가 평지하고 달라요. 한 19도 차이가 나요. 어떤 데는 50차 가지고 가니까 겉이 다 얼기도 했어요. 그래서 노동조합 간부들하고 신용협동조합 간부들 다 불러놓고 회의를 했어요. 어떻게 하냐? 언 것은 간부들이 먹고 안 언 것은 조합원 주자. 평균 3천원이면 여주에서 1500원이면 가져갈 수 있어요. 반값에 질 좋은 물건을 50차씩 직거래. 바로 이거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1985년 원주 소비자협동조합을 조용히 시작하게 된 거예요. 이사장을 박재일 회장이 하고 나도 거기서 이사로 일을 하고 그러면서 원주 관내에서는 횡성군 공근면이나 호저면에서 계약재배를 처음으로 시작했어요.

땅이 산성화 되 있어서 첫해에는 실패했어요. 산성화뿐만 아니라 그때는 유기농 농사를 아무리 잘해도 배추는 되질 않아. 맨 구멍만 뻥뻥 뚫리고, 크기도 작고, 관행재배한 건 실한 게 한 포기에 1,000원인데 계약재배를 한 것은 2,000원이요. 이것을 집집마다 리어카에다가 실어서 가져가면 내 마누라 박재일 마누라 부터 인상을 쓰고 이걸 배추라고 하느냐고 해요. 그렇게 계약재배 실패를 거듭해서 5,6년 했어요. 이런 일을 겪은 뒤  계약재배의 성공하고 나서  박 회장이 서서히 서울에 올 준비를 한 거예요.

아주 재미난 얘기는 시간이 많이 없기 때문에 짤막하게 하는데, 1985년인가 나는 그때 이미 광산에서 광부들과 일하면서 신용협동조합 협의회장을 맡고, 지주교님이나 장일순 선생님이나 김영주 회장이 저도 바깥 일을 하도록 배려를 해줬어요. 박재일 회장은 가톨릭 농민회 이름으로 전국적으로 일하도록 배려를 해주고 그런 때인데, 무위당 선생님이 불러요. "재일아, 경국아, 너희 둘 의논 좀 하자, 어차피 경국이 너는 이미 신용협동조합 중앙회 부회장까지 됐으니, 신용운동을 통해서 그 길을 가라. 재일이는 이제 원주에서 떠나야 겠다."  재일이가 깜짝 놀라더라고. 왜나면 이제는 생산된 걸 가지고 원주사람에게만 파는 것은 한계가 있어, 먹거리든 유기농산물이든 장터 그 속으로 가라고 한 거지.

그때 지주교님이 프로젝트를 신청 해뒀어요. 지금 이야기 하지만… 우리는 미제레올에서 프로젝트를 받아가지고 사회개발위원회 일을 잘했기 때문에 인정을 받았어요. 무위당 선생이 뒷바라지를 했지. 3년 프로젝트를 하라고했어요. 그걸 기반으로 
 1986년에 제기동에 한살림이 문을 열었어요. 그 프로젝트가 3년 동안의 나중에 1단계 제기동에서 2단계 딴 데, 이렇게 가면서 연결된 사업으로 갔어요. 그 때만 해도 그게 큰 돈이야, 그걸 만들어서 한살림 문을 열 때, 전국에서 노총위원장하던 김기백 위원장 비롯해서 이영희 선생까지 많은 분들이 참여했어요.

한살림이 20년 동안 일을 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인농 박재일이 원주에서 18년 동안 사회개발위원회에서 일하면서 생산자들과 함께 소비자운동을 한 큰 경험이 생명운동으로 연결되고 그 과정에서 생명운동으로 연결되게 하기 위한 의식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 솔직히 말하면 서울 문리대 나온 사람들이 농민과 평생 살 생각을 하지 않겠지만, 박재일 선생은 18년을 살았어요. 그 역사가 바로 생산자와 소비자의 삶을 통해서 한 단계 큰 일을 해보자는 것이 박재일 회장의 큰 업적으로 남는 일이 아닌가 생각해요.

두 번째, 사회개발 위원회시절, 늘 우리 무위당 선생이 생산자인 농민을 성군으로 모셔라. 성군으로 모시지 않으면 생산자를 존경할 수 없다. 그러니까 박재일 회장은 힘들고 어려울 때, 생산자들과 끝까지 대화하고 정을 나누고 술 한 잔 나누고 껴안고 가고 토론하고 했어요. 원주에서 사회개발위원회 10년 동안 아주 진을 빼게 회의를 하거든 그렇게 회의를 한 게 가톨릭농민회 가서도 그랬던 것이 박재일이다. 그게 거저 온 게 아니에요. 물론 영덕 촌놈이야. 그러나 그 문리대 나온 사람이 농민과 생활 속에서 더불어 함께 살려는 몸부림치기는 쉽지 않아요. 농민을 성군으로 모시는 큰 업적, 나는 뭐니 뭐니 해도 장일순 선생님하고 함께 갔던 그 역사가 바로 오늘 박재일 회장을 있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18년 동안 원주의 사회개발위원회 역사, 부인인 이옥련 여사가 비 오고 바람 부는 뚝방에서 끝까지 뒷바라지 해주면서 박 회장이 전국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울타리가 돼주고, 이 여사의 공로도 대단한 거야.

박재일 회장의 제 2의 고향, 원주가 고향이고 삶이었어요. 사회개발위원회의 숨어있는 역사는 바로 그것이 삶이었다. 그렇게 마무리 할게요.

사회: 네 고맙습니다. 어쨌든 저도 이경국 선생과 30년 인연이 되는데 오늘 이렇게 감동적인 말씀 잘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길재: 친구라고 너무 격찬한 거 아냐?

이경국: 아니야 진짜야. 박재일이 너무 보고 싶어.

사회: 이제 자연스럽게 카톨릭 농민회 시절로 넘어가면 좋을 것 같은데 이쯤에 저도 에피소드 하나 보태겠습니다. 지난 7월에 한라산에 갔었습니다. 30년 전에 박회장이 가톨릭 농민회할 때 생산비 조사 사업한다고 함께 제주도에 간 적이 있었는데, 30년 만에 한라산 올라가서 당시를 회상해 보았습니다. (제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들어갔다 75년 봄에 나와서 그해 12월에 원주에 갔는데 그 때 마침, 원주 가톨릭 센터에서 쌀생산비 조사원 교육이 있었어요. 그 때 선배님들도 잘 아시겠지만 제가 성격이 좀 고약했지 않습니까? 밤 12시 넘어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노는데 누가 올라오는 거예요. 올라와서 노래 그만하고 자라고 할 거라고 생각하고 한마디 말하면 제가 ‘붙을려고’ 했어요. 그런데 올라오시더니 술을 같이 먹고 놀자는 거예요. 이런 선배가 있나 하고 깜짝 놀랐어요. 그때부터 박재일이라는 사람을 형으로 모셨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형이라고 부른 사람입니다. 그 인연으로 제가, 동생 역할을 잘 못했지만 제 마음 속에 맏형으로 모시고 있는데, 박재일 형과의 인연으로 무위당 선생님을 만나서 스승으로 모시게 됐고, 또 재밌는 게 재일이 형이 진광중학교 영어교사로 있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제 안사람이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원주에서 형을 만나고 스승을 만나고 아내를 만났습니다.

이경국: 부인 이름이 박정희야

이길재: 박정희와 이병철의 위장 결혼이라고 했지. (웃음)

사회: 결혼식장에서 하객들이 농민가를 부르니까 처갓집 식구들 놀랬죠. 또 하나, 1989년에 가농 사무국장을 맡고 있을 때, 한살림에서 밀이 필요한데 다 멸종 위기였죠. 밀은 살리자고 해서 고향 마을에서 몇몇 가구를 설득해서 최초로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시작했죠. 1990년에 처음으로 우리마을에서 밀을 가지고 잔치를 하고 이게 모태가 돼 우리밀살리기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그 뒤로 귀농운동, 생태산촌운동이니 이런 일을 할 때, 형님께 뭘 좀 맡아 달라고 부탁하면 한 번도 그게 뭐하는 거냐 물어본 적도 안 한다는 말을 한 적도 없어요. 인농 선배하고는 한 번도 다퉈 본 적이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제 의견에 다 동의 했다기보다는 마음에 안 맞는 게 있더라도 다 포용하려는 생각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 측면을 본다면 운동판에서 맏형 역할이라든가 자기 몫을 훌륭하게 하신 분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가농시절 이야기를 이길재 선생을 통해서 듣겠습니다.

이길재: 1973년부터 한살림을 시작하기 전까지, 1985년까지 12~3년가량 박재일 회장은 가톨릭농민회 전국본부 일에 참여합니다. 전국 본부에서 핵심멤버였고 1982년, 83년 가농전국회장을 2년 동안 맡았어요. 8대 회장이고, 제가 초대 회장이니 새카만 후배죠. (웃음) 그러나 실제로 보직은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973년도부터 1985년도 그 때가 가농으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시기, 군사독재정권과의 싸움이었고 그 싸움이 가농이 성장하는 기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박회장이 가농 전국본부 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을 회고해봅니다.
그때, 이경국 회장도 이야기 하셨지만, 지금 가농은 평화시절 운동입니다. 그때는 벌써 주변 여건이 계속 감시를 받고 사찰을 당하고 개인적으로나 조직이 모이기만 하면 우리를 둘러싸고 도처에서 사찰하고, 원주에서 활동하던 박 회장이  가농이 구미(왜관)에 왔다가 또 대전으로 전국본부를 옮겼을 때, 1976년도부터 옮겼는데, 오기만하면 그냥 원주 경찰서가 난리가 납니다. 담당형사가 누구지?

이경국: ooo이 지금 우리 가톨릭 신자 됐어.

이길재: 그렇게 됐어?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까 술 이야기도 잠깐 나왔는데, 아마 그런 사회적인 환경이었기 때문에 술도 많이 먹고 했을 겁니다. 회의도 안건 하나 가지고 진을 뺄 정도로 이리 평가하고 저리 평가하고 분석하고 과거 경험이 어떻고 지금 사회환경이 어떻고…, 이러다 보니까 밤샘을 하는 회의를 그냥 이틀 삼일 이렇게 계속하니까 술을 안 먹고는 회의를 못하죠. 기본이 3박 4일 정도니까 그래서 술을 많이 먹게 되죠.
그리고 특히 박회장은 이경국 회장과 같은 강골들과 술을 배웠으니 술을 더 잘 마셨고, 한번은 춘천에서 강원도 가농 지도자 훈련 3박4일 코스를 마치고 헤어지는데, 모두 버스 타러 터미널로 가고 있는데, "야 우리가 사흘 동안 있었는데 그냥 헤어질 수 있냐, 딱 막걸리 한 잔만 하고 가자" 하고 술집에 들어간 것이 박재일 회장, 김상범 등 소위 강원도 지도자 그룹 과 우리들과 같이 어울려서 오전에 버스 타러 가다가 술 한 잔 하자는 것이 하루 종일 마셨습니다. 그럴 정도로 다들 술 실력들이 대단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다 운동의 여건과 관련이 있다 생각이 되고요.

그 때 소작농 조사, 농지문제 정책적으로 제기하고 쌀 생산비 조사해가지고 수매가 문제를 제기하고 이렇게 구체적으로 가농이 박정희 정권에 도전을 하니까 정권이 보기에는 이게 간단한 조직이 아니었죠. 그러니까 함평 고구마 사건 같은 것이 일어나고 안동교구 오원춘 사건이 일어나고 이런 식으로 점점 확산되고 나중에는 천주교와 정권의 싸움으로 발전을 하게 됩니다.

박재일 회장이 그런 속에서 일을 했으니 고민도 고생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과 조건 속에서 운동하는데 박 회장이 가농에 어떻게 기여했을까 가만히 회고해 보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원주 사회개발 사업, 1973년부터 재해대책사업이라고도 하죠. 가농에 와서 시간을 많이 보냈지만, 실제로 농촌 사업을 맡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회개발위원회시절) 현장경험이 가농 운동의 전략과 구체적인 활동 계획을 세우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여겨집니다. 그 후에도 지학순 주교님을 비롯해서 원주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 소위 교회의 현실참여 운동 이것을 실천한 한국 천주교에서 대표적인 교구였기 때문에, 거기서 얻은 경험들이 박 회장을 통해서 우리 가농에 큰 도움을 준 게 아닌가 생각해요. 박 회장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에 못지않게 저는 박 회장의 인품을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앞에서  두 분이 말씀하셨지만 어떻게 보면 내성적이고, 대단히 침묵을 하고. 말 잘 안하고 사람들보면 씩 웃고 회의 때도 다른 사람 열 내서 이야기 하는데 그냥 씩 웃고 앉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답답하다할 정도로…, 그런데 저는 그게 그 분의 인품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넉넉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있는 인품. 그것이 가농의 전국본부 운동에 있어서 조직원들 가운데 신뢰를 구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 시절 다들 예리하고 날카롭게 하니까 조그마한 일에도 충돌할 수도 있고 성질도 내고 싸움도 나고, 우리 이병철 형제같이 까다로운 사람은 막 자기 주장도 하고 그러니까 충돌도 일어나고 그러는데 우리 박재일 회장 같은 인품이 분위기를, 신뢰를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런 점이 운동이론이나 운동경험이나 지식, 경험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그런 인품이 항상 10여 년 동안 그런 박 회장의 이미지는 한 마디로 하면, 넉넉한 형으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여겨집니다.

에피소드가 있는데, 박 회장보다 한 살 많은 서경원 회장이 한참동안 박 회장에게 형님 형님하고 다녔어요. 사실입니다. 한참 그러다가 주민등록을 꺼내 보고 발각이 난, 그런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는데… 아무튼 언제나 누가 보더라도 맏형 같은 그런 역할을 박 회장이 했습니다. 이런 모습이 제가 회상하는 박재일의 인상입니다.

사회: 이길재 선생도 말씀하셨지만 1980년, 굉장히 상황이 힘들었습니다. 운동판 자체가 쑥밭이 됐고, 저들이 온갖 매스컴을 통해 심지어 가농을 학생운동을 배후조종하는 집단으로 미문화원방화사건 진범으로 공격하고 가톨릭 내부에서도 가톨릭 농민회를 없애겠다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그 큰 조직적 책임을 맡아서 갔을 뿐 아니라 1980년을 기해서 가톨릭 농민회가 생명공동체운동을 표방하고 굉장히 중요한 결정을 해요. 철저히 현장 중심으로 가겠다는 것이었는데, 그런 것이 다 박재일 선생의 경험에서 나온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제 가톨릭 농민회 시절을 지나서 자연스럽게 한살림, 제기동 시절로 바통이 넘어왔는데 우리 서형숙 선생님께서 하실 말도 많고 그리움도 많겠습니다. 한 때 저희가 우스갯말처럼 박재일과 그 여인들이라고 했는데 (웃음) 거기에 서형숙이라는 이름이 빠지지 않겠죠.

서형숙: 그렇죠? 요 근래 한살림에서 제 소개를 초창기 회원으로만 하는데, 20년 넘게 함께 활동을 했습니다. 2005년에야 처음 평이사가 됐고 그 다음에 평회원으로 돌아왔습니다. 회장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90년, 사실은 그 무렵 회장님은 한살림을 만들어놓고는 계속 소비자 조직이 움직여야 된다고 하시고 본인은 소협중앙회장으로 가시고 한살림에는 거의 계시지 않았어요. 제가 1989년에 회원이 되고 1990년 총회 때 축사를 하러 오신 회장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때 회장님이 딱 지금 제 나이 였어요. 53~54살 그런데 저는 굉장히 할아버지인줄 알았어요. 항상 느긋하고 여유가 있고 유유자적 했던 분으로 여겨졌어요.
 아까 김정남 선생님이 회장님을 운동가가 아닌 것 같다고 하셨지만, 제가 보기에는 딱 운동가가예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속내를 별로 드러내지 않으세요. 갈 데까지 가요. 갈 데까지 가게 둬요. 한살림 내에서는 소비자 활동 조직이라는 것이 저희 소비자들이 일을 다 꾸리고 그것을 현장에서 실천해보고 평가하고 이런 얘기들을 함께 하셨어야 했는데 술로 나눌 수 있는 내용도 아니었고 그런 점에서 저희가 건강관리를 많이 해드린 그런 시기였어요. 또 하나는 굉장히 끈질기게 똑같은 일을 또 내놓고 또 내놓고 하면서 어딘가 길을 찾게 하셔요. 제가 일을 잠깐 그만두겠다고 하니까  만나서는 없는 이야기처럼, 이런 저런 일을 같이 하자고… 전혀 듣지 않은 것처럼 또 얘기하시는 것예요. 마치 처음 얘기 하는 것처럼…, 그런데 제가 너무 힘들어서,  잠깐 네덜란드에 갔다 왔을 때는 정말 어려워서 아이가 학교 적응도 하고 쉬어야 될 것 같다고 했는데, 또 찾아 오세요. 또 일하러 나오라고…, 그런 끈질김. 다시 만나도 마치 처음 하는 이야기처럼 신선하게 또 내놓을 수 있는 끈질김.
그렇지만 굉장히 유연하셨어요. 새로운 일들을 받아들일 때, 아니 이것도 해보지, 이렇게 하면 어떻겠어? 그래서 조직 개편될 때도 그렇게 힘들어하시지 않으면서 바꾸고 바꾸고 또 더 낳은 쪽으로 해보는거죠.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운동가 기질이 많았던 분이다 싶어요.
그리고, 한살림 조직 안에서는 안 계시는 것처럼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실무책임자로 계셨고, 소비자 조직, 생산자 조직이 따로 있어서 이 세 가지 기둥이 함께 움직였었던 게 한살림이었으니까요. 여러 어른들 말씀을 듣고 나니까 회장님은 원주나 가농에 비하면 한살림에서 제일 편하셨던 것 같아요. 오히려 재미있었고, 저희들이 열심히 일하면 같이 즐거워 하셨고.

작년 여름 병원으로 뵈러 갔을 때는 굉장히 고통스러워하면서 두 손으로 허공을 젓고 계신데, “회장님 한 평생 많은 사람, 좋은 사람 만나서 한 바탕 잘 노셨죠?” 그랬어요.  같이 간 사람들과 함께저희도 더불어 잘 놀았습니다. 했는데 허공을 응시는 하지만 의식은 없으셨어요. 그래도 저는 일어나실 줄 알았어요. 1993년 교통사고로 버스에서 떨어져서 굉장히 크게 다쳐 병원에 오래계셨어요. 그런데 그때도 아주 건강하게 일어나셨고. 나중에는 국선도 수련을 하셔서 건강하셨고, 이번에도 암 수술을 받고 나서도 한살림선언20주년 행사에도 나오셨기 때문에 마지막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가셨어요. 가시고 나서도 저희는 회장님이 아마도 많은 한살림 일 안에, 물품 안에, 한살림 안에 계시까 ‘그리워요’ 말 하지는 않아요.
제가 부회장을 하던 당시에는, 많은 소비자 조직이 움직였고 한살림의 안살림들을 다 소비자 조직들이 했어요. 그러니까 물품 제대로 이용하기, 생산자들은 소비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책임진다는 생각으로 함께 하니까 매일매일 벌어지는 일들이 재미있고 신났어요. 정말 살만 했어요. 실무자들은 중간 역할을 하는데 실무자들이 고될까봐 회원들이 전화 받으러 나가서 일하고 그런 궁리 하나하나를 회원들이 매일 만들어내고 움직이고 그 열매들도 눈앞에서 보기 때문에 정말 살 맛이 나고 보람이 있었거든요.
아주 신명나게 긴 세월, 그러니까 많은 소비자 회원들에게 물으면 생산자들도 마찬가지이시겠지만 한살림이 마치 자신의 종교고 철학이고 인생이고 삶이에요. 저도 서른셋부터 지금까지 한살림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삶을 살았어요. 한살림은 장일순 선생님을 통해서 철학이 정리가 많이 되어 있었고 회장님이 오히려 말없이 계시면서 우리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게 뒷바침 해주셨어요. 장일순 선생님이 1991년인가 92년에 암투병중에 한살림에 오셨는데, 오셔서 하신 말씀이 “소비자가 생산자의 주인이 돼라. 주인이 뭐냐? 먹고 살게 하는 사람, 웃게 하는 사람, 소비자들이  활용을 잘 해주면 생산자들이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래서 (주인인)저희가 물품이 남으면 길에 나가서 팔고, 돈을 만들어서 산지에 보내고 이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너나없이 했어요. 다들 운동가였어요. 그런데 이 운동가가 집에서 살림도 살고. 밥 세끼 차리는 것이 사실 운동이었고 생활이었어요. 이것이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이니 잘 할 수 있었어요.

회장님의 성격을 보면 제일 첫째는, 성 내지 않아요. 1991년 92년, 생산자 조직이 다 파괴되고 정신이 없었어요. 조직이 복잡해져 있을 때, 그 조직 전체의 책임자는 박재일 당시 전무님이셨죠. 책임지고 나가라고 하는 흐름도 있었고, 그래서 조직자체가, 생산자들도 그렇고 소비자들이 중심에 서서 풀겠다고 총회도 몇 번 했는데, 그냥 그러시는 거예요. “문제가 있다면 본인을 변호하지 않고, 본인이 책임지고 나가면 됩니다.” 이렇게 말씀하세요. 옆에 있는 사람들이 나서서 그 문제를 풀고 회장님도 조직도 본래의 자리를 찾는 데 몇 년이 걸렸지만 그래서 장일순 선생님도 소비자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병중인데도 그 때 오셨던 거고요.

또 하나, 회장님은 참 잘 웃으세요. 언제나 활짝 웃는 소리가 들릴 정도 웃으셨어요. 한번은 이런 적이 있었어요. 일본에 그린코프생협연합 10주년 행사에 갔을 때, 양복이 구겨져 있어서, “제가 다려드릴테니 내놓으시죠.” 그랬더니 “아 이미 내가 주름 펴지라고 물뿌리개로 뿌려가지고 욕실에 걸어 놓았어요. 이런 거 내가 잘해”고 하셨어요.
굉장히 소명하신 사모님과 영특한 따님들을 두셨죠. 그래서 그런지 굉장히 잘 하셨어요. 그리고 해맑게 잘 웃으세요. 또 제일 재미있던 이야기가 뭐냐 하면, 한살림 처음 만들었을 때, 유정란 팔고, 쌀 팔고 그럴 때, 전화 받는 아가씨 있고 그랬을 때, 이야기할 때 굉장히 많이 웃으셨어요. 어려운 시절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도 항상 웃으셨어요. 처가에서 결혼은 했지만 사모님이 신행을 하기도 전에 아이까지 임신한 상태에서 도피생활 하고 감옥에 갇히고 그러셨죠. 출옥한 뒤에야 사모님이 신행을 했거든요. 그 시절 이야기들, 어떻게보면 목숨이 위태로운 어려운 시기를 추억하는 이야기를 하실 때도 늘 웃으시는 거예요. 찡그리면서 말을 하거나 그런 적이 없으셨어요.

또 하나, 그 분은 굉장히 감성적이고 다정다감했어요. 그러니까 많은 회원들이랑 어느 자리에서든 만나면 술도 마시고 어울리고 나라 정치나 큰 이야기 하다가도 아주 작은 이야기, 소비자 조직 이야기를 해도 전혀 힘들어하지 않고 잘 어울렸어요. 굉장히 감성적인 분이었죠. 작은 이야기도 굉장히 오랫동안 관심 가지고 들어주세요. ‘아봐타’수련 다녀오신 뒤에는 과거에는 못했던 일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어요.

저희 아이들이 두 돌, 네 돌 될 때, 한살림 활동을 했었으니까, 늘 아이 데리고 출근을 했었죠. 그 아이가 나중에 대학 들어갔을 때, 어디서 먼저 듣고 집으로 전화하셔서, (수화기) 저 쪽에서 웃는 모습이 보일 것처럼 좋아하시면서 축하해주셨어요. 2006년에 제가 ‘엄마학교’를 열고나니까 당장 찾아 오셔서 제일 필요한 게 뭔냐며 사주고 싶다고 하면서 얼마 뒤에 전기주전자를 우편으로 보내오셨어요. 아주 다정다감하고, 딸들과 사셔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런 부드러움이 있었어요.

또 하나, 굉장히 유연한 분이었어요. 수돗물 불소화반대 운동할 때, 회장님은 처음에 반대하셨어요. 건치 등과의 관계가 있으셨으니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면 우리 같이 공부를 해보자, 그래서 서울대 환경대학원 김정욱 선생님을 모셔 와 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그 시간이 지난 뒤 본인이 판단이 선 뒤에는 가두행진에도 앞장서셨어요.
한살림이 10년이 지난 뒤에는 조직이 조금 탄탄해져서 밖으로 나가서 좀 더 큰일을 하자는 의견이 많았어요. 일본 그린코프와 관계하면서 일본은 과거의 역사를 미안해 하고, 우리는 지금도 전쟁을 하고 있는데 종군위안부 문제는 계속 전쟁을 치루고 있죠. 그 얘기를 소비자들이 하자고 해서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 등에) 참여하게 됐어요. 처음에 한살림에서는 직접 행동에 나서는 것에 대해 반대 의견이 많았어요. 한살림의 공식적인 입장이 그렇다면 일단 소비자 활동위원회에서 하겠다 하고 우리들 힘으로 스스로 풀겠다하고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한살림 조직 전체가 함께 하게 됐어요.
우리 쌀 살리기, 100인 100일 걷기를 할 때도 소비자들이 먼저 걷고 있으니까 조직이 참여하게 됐어요. 회장님이 이끌던 한살림은 이견이 있어도 서로 그 입장을 경청하면서 나중에는 조직 전체가 바른 의견으로 모아지게 하는, 회장님의 그렇게 유연한 부분이 바로 큰 운동가의 모습이었던 것 같아요.

회장님은 ‘욕심이 참 없어서, 욕심이 아주 많아서’ 우리는 좋아했어요. 돈에 대한 욕심이 없으셨고, 세상을 크게 만드는 데는 욕심이 많으셨어요. 18년 정도 함께 일했고, 안 살림은 제가 하고 바깥 일은 회장님이 하셨는데, 회장님이 사모님인 이옥련 여사가 계셔서 집안 살림 걱정 없이 바깥 활동을 하실 수 있었던 것처럼 한살림에서는 소비자조직들이 하나하나가 매일 세 끼 밥상을 제대로 차리면서 일관되게 운동을 생활화했기에 때문에 한살림이 한결같은 길을 걸을 수 있었어요. 그 안에 어른으로 회장님이 계셨다고 저는 그렇게 평가합니다.

사회: 한살림 생산자로서뿐만 아니라 가농시절부터 회원이었던 정광영 선생께서 생산자로서 또는 농민으로서 본 박재일 그는 무엇이었던가.

정광영: 박재일 회장님은 1977,8년 무렵 제가 가농 분회장을 하면서 뵈었습니다. 당진에서 전국 추수감사제 할 때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회장님과 가깝게 자주 만나서 대화를 나눈 것은 제가 1987년에 한살림에 참여하면서부터 였어요. 1986년 가을인가? 이상국씨가 먼저 찾아와서 한살림운동 하는데 생산자로 참여하라고 하는데, 대답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또 언제는 회장님이 가농 모임에 갔는데, 한살림 운동을 하자고 그러셔요. 생산자가 필요한데 가농회원들이 해야만 될 것 같다. 농약을 안 주고, 쉬운 일은 아닌데 해보겠는가? 그 때 가농에서 하는 일은 무조건 옳은 일이고 해야 된다 싶어서 제가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대답한 일을 후회하고 농사도 실패하고 힘든 일이 많았습니다.

회장님은 엄격한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처럼 저희들을 감싸고 끌어주었습니다. 생산자가 있어야 소비자가 있으니 어려워도 하자고 달래주셨습니다. 회장님이랑 이상국 씨에게 한살림을 같이 하겠다고 대답을 해놓고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 때문에 한동안은 가정불화도 있었고 그랬는데, 한번은 회장님이 저희 집에 오셨어요. “오늘은 자네 집에서 묵어가야겠네” 하셨어요. 그 때 제가 너무 힘들어서 한살림 안하려고 하는 낌새가 보였던 것 같아요.(웃음) 저는 술을 못하는데, 앞마당에 심어놓은 포도로 담은 술을 드리니까 마시면서 회장님이 “앞으로 한살림의 전망은 이렇다. 우리는 정말 밥상을 살리고, 땅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데, 농민, 생산자가 앞장서지 않으면 이 일은 못한다. 신앙인으로서, 가톨릭 농민회 회원으로서 어쨌든 자네랑 나랑 이런 인연이 있으니 이건 어렵더라도 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새벽이 되도록 주전자에 담아놓은 술을 밤새 마시면서 말씀을 하시는데, 이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해야겠구나 싶었어요.

회장님이 때로는 “야, 이거 어려워서 못하겠네” 그러신 때도 있어요. 그러면 제가 회장님이 시작하셔놓고 안하시면 어떡합니까? 우리들도 이거 다 포기하고 다른 거 하겠다고 했죠. 소위 서울에서 명문대학을 나오고 지식인이라는 분이 대개는 말로나 이론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고 뒤에서 보기만 하는 게 보통인데, 이 분은 안 그래요. 말뿐 아니라 실천가였어요. 실천가라고 느낀 것은 가을에 제가 새벽 4시에 김장 배추를 가지고 가면 천막에 불 피우고 있다가 맞아주고, 저랑 같이 트럭 타고 소비자 집을 방문하는 것을 보고는 제가 같이 안할 수가 없었어요. 지금 세상 인심으로 보면 ‘똑똑한 바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흔히들 배우신 분들을 보면 궂은일은 안 하는데, 정말 몸소 실천하고, 나중에 인농이라는 이름을 알았지만 어진 농부의 마음을 가진 정말 착하고 호감이 가는, 인생의 훌륭한 선배였고, 한살림을 하면서 오래도록 저희들이 모시고 그렇게 했었어야 했는데 많지도 않은 연세에, 가셔서 정말 아쉽습니다. 하늘에서도 저희 생산자, 농민들을 잘 인도해주시리라 여겨집니다.

사회: 한살림 하면서 생협중앙회 회장도 하셨는데, 생협중앙회 사무총장을 지낸 장용진 선생이 박재일 선생이 생협운동을 사회적으로 확대한 과정에서 보고 느낀 박재일에 대해서 소개해 주시죠.

장용진: 사실 아까 이경국 회장께서 말해주셨지만  원주가 자천 타천 협동조합 메카다 이런 말을 했고 지금도 그렇잖아요. 출장을 자주 갔습니다. 회장님이 38년생이고 제가 49년생이고 저랑 11살 차이인데, 저를 상당히 좋아해주셨어요. 강원도 출장을 많이 갔습니다. 물론 다른 지역도 많이 가고 창립총회, 정기총회 등 각종 행사가 얼마나 많았겠어요, 강원도 출장이 특히 많았는데, 어떤 다리 하나를 지나가도 그 배경이나 얽힌 이야기 같은 것을 초등학교 제자, 아들에게 말해주는 것처럼 그렇게 자세하고 정이 많게 설명해 주셨어요. 덕분에 강원도 사람, 햇살, 바람 이런 것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지금 강원도 사는데 그런 인연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출장을 갔다와서 고속터미널에서 내리시면 가족들이 기다리고 계실 텐데도 집에 곧장 안 가시고 제가 지금은 술을 잘 안 먹습니다만 그 때는 많이 먹었거든요. 회장께서는 (출장)갔다오시면 출장갔던 이야기도 하지만 고생했다 이러면서 나이 어린 저한테까지 배려하고 위해주셨어요. 지금 생각해도 대단했어요.

제가 회장님하고 20여년 같이 일했습니다만, 지금도 항상 회장님의 그런 마음씀씀이를 많이 느끼고 지금도 새롭습니다. 일에 있어서는 회장님은 다들 아시는 것처럼 농촌, 농민문제 뿐 아니라 협동조합 운동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제가 1985년도에 생협 중앙회에 들어갔는데, 그때, 회장님께서 대학생활협동조합에 굉장히 관심이 많으셨어요. 그래서 대학생활조합이 잘 되고 확대되어야 지역 생협의 밑거름이 되고 인재도 거기서 나온다고 하셨어요. 그 당시에 전국에 각 대학마다 학생복지위원회라고 있었어요. 서울에는 서복련이라는 연합조직이 있었지요. 이들이 대학에서 협동조합을 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일본 효고현, 거기에서 고배대학생협, 관서대학생협 등 지역생협, 시민생협을 돌아보시면서 고성군수, 이길재 선생 등과 서복련 활동 하는 학생들과 함께 대학생협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하셨습니다.

또 하나, 조현선 회장이 계시지만, 안성에서 의료생협이 먼저 시작됐는데, 의료생협에도 관심이 많으셨어요.이 있었어요. 장일순 선생님 부부와 함께 일본 니가타 총합생활협동조합 의료부문 활동을 보고 와서 일본 연합생협연합회 협조로 얻어온 자료를 조완형 전무가 번역해서 안성에서 의료생협을 결성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지역생협뿐 아니라 이 부분은 실제로는 사정을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대학생협에 대해 어르신이 관심이 많으셨고, 대학생협이 되어야 지역생협으로 갈 수 있다. 일본도 대학생협을 만들고 그들이 지역생협도 만들었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렇게 하자, 이렇게 말씀하시던 부분들이 생각이 납니다. 또 하나는 환경농업단체연합회 만들자고 해서 권영근 박사와 함께 소비자 생산자가 함께 환경농업단체연합회 만들자고 하셨는데, 그 때 환경농업에 대한 법하고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 약칭 ‘생협법’, 이 두 가지를 같이 추진을 했어요. 이게 별개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서로 보완, 상생관계였기 때문에 결국은 환경농업농사법이 1년 먼저 제정되고 생협법은 1998년 12월에 제정 됐는데, 이 과정에서 ‘환경농업이 확장되고 발전하면 생협도 같이 간다. 또, 생협이 잘 되면 이것이 환경농업에 거름을 준다’면서 이 두 법을 제정하기 위해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셨어요. 나중에 환경농업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생협법을 제정하기 위해 정말 노력하셨습니다.

생협중앙회가 돈이 없어서 사무실을 옮기게 됐습니다. 겨우 합정동에 작은 사무실을 얻어 이사를 가게 됐는데, 회장님은 바닥을 손수 혼자 다 닦으세요. 위험하게 창틀에 매달려 유리창을 닦으시면서 즐거워하시던 모습이 제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제가 회장님을 존경했던 것보다는 더 많이 회장님이 저를 굉장히 아껴주셨던 것 같아요. 늘 찾아가서 뵙고 싶고 그리운 그런 분입니다.

사회: 우리 모두 박재일이라는 사람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고 우리 가슴에 남아 있는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최양부선생이 자리를 함께 해주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 환경농업이 중요한 지위에 있습니다만 그렇게 되기까지 끌어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책임, 사명감과 관련해서, 최양부 선생께서 농업정책을 만드는데 박재일 선생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최양부: 오늘 이 자리에 초대해주신 걸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사실은 그분과 사적인 만남의 공간은 없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듣는 모든 이야기가 생소하고 처음 듣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박 회장님과 제가 만난 시점이 1993년인가 한살림 정책토론회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 이전 전사에 대해서는 전혀 활동한 공간이 달랐으니 몰랐습니다. 저는 공직에 들어가 있었으니 사회운동을 한 분을 만나는 일이 사무적일 수 있고 대단히 드라이하게 서로가 신뢰감이라든지 사적인 공감의 영역을 전혀 공유할 게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좌우간 저는 그때 박 회장님을 만난 후 지금까지도 그 인연이 이어졌고 오늘와서 1주기 자료를 보니까 작년 장례식때 외국에서 보내온 추모글을 모아놓은데 제 글이 있어서 저도 놀랐습니다. 2010년도 그 때 마침 제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출장을 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멀리서 추모글을 보냈던 것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06년에 11월에는 박 회장님과 열흘 가까이 쿠바 농업을 둘러보러 가서 대화도 나누고 그 때가 가장 편안한 사적인 자리였고, 그걸 제외하면 나머지는 거의 다 공식적인 자리, 사무적인 자리고 이런 공간에서만 만나뵈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한살림정책토론회에서 제게 특강을 부탁했고, 그때 제가 발표한 논문자체가 농촌경제연구원이라는 공조직 부원장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기에는 현실보다 여러 가지 앞서가는 환경농업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게 아마 서로 공감을 갖게 된 계기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살림과 박 회장님이 계셨기 때문에 그게 끈이 됐는데, 그 때만 해도 제가 청와대 들어갈 거라고 상상도 못하던 때였죠. 1993년 10월 달인데 12월 달에 제가 청와대 농림수산 수석으로 들어갔습니다. 가장 안에서 공무원 조직과 많이 부딪쳤어요. 오늘 지금까지 박 회장님 활동에 관해 말씀하신 모든 내용들이 다 재야에서 이루어진 활동이지 공조직과는 무관한 일이었지요.
공조직은 전혀 이런 것을 생각하지도 않을 때인데, 그래서 이 문제를 공조직에 끌어들이기 시작을 하는데, 저도 정부내의 (관료들과) 부딪치니까, 생각을 하다 결국 민간 사이트에서 뭔가가 조직되어야 겠다 생각을 하고 민간 단체 조직 상황을 보기 시작했던 것예요.

그 때만 하더라도 모든 활동 단체들이 서로 수평적 교류가 거의 없었어요. 제가 말씀을 들으니까 가톨릭농민회, 박 회장님이 활동했던 쪽은 운동권 안에서도 정부와 가장 반대편에 서 계시기 때문에 아마도 정부에서는 경원시 할 수 있었고, 어쨌든 그런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서 박재일 선생님하고 다른 단체들하고 함께 하는 자리가 마련이 됐는데, 그게 환경농업단체연합회의 시발점이 되었고, 그것을 통해서 법을 만들고 한국농업정책에 환경농업을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박재일 회장님은 앉아계시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이고 묻어나오는 카리스마가 있으셨던 것 같아요. 오늘 들어보니까 그동안 많은 경험과 실천 속에서  큰 그릇으로서 존재감이 생겨났던 것 같습니다.  그 분과 함께 한 시간은 짧았지만 그동안 다른 단체들을 그 존재감으로 품어 안고 법을 제정하는 복잡한 과정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한 박재일 회장님의 힘이 사실, 오히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그 분의 역할과 존재의 카리스마가 컸었구나 하는 것을 지금 이 자리에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제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1994년도부터 환경농업단체 등이 만들어지고 그 단체들이 아직도 부족합니다만, 그 단체들을 끌고 자리를 잡아가고 법을 만드는 활동, 정말 어려운 과정이었습니다. 또 그 과정에 회장님께서도 당시 국회의원이던, 이우재 회장님의 협조를 받아서 박 회장님과 마지막에 만나고 저희들이 조정을 하면서 정말 초당적으로 협력해서 법안이 통과됐습니다. 역시 그 배경에는 박회장님의 카리스마가 큰 힘이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부가 바뀌고 대통령이 YS에서 DJ로 바뀌고 정책적으로 변화가 오는 과정에서 국민의정부가 친환경농업의 원년을 선포하면서 그 전에 있는 역사를 정당하게 인정했으면 좋겠는데, 그것을 그대로 역사 속에서 넣어버렸거든요. 그러고는 모든 게 새로 시작됐다고 하면서 1998년을 친환경농업원년으로 삼아버리니까, 그리고 새로 등장한 사람이 YS시절시절부터 환경농업정책의 주역이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그 일을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까지도 소외시키고 환경농업정책의 무임 승차자들이 갑자기 등장해서 환경농업정책을 주도하기 시작합니다.
이전의 역사가 한꺼번에 다 묻혀버려서 아직도 복원이 안 됐어요. 심지어는 정부가 제 3차 친환경 5개년 계획을 말 하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YS시절 5년 동안의 노력을 포함시켜 4차 5개년 계획이라고 말 해야 옳습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왜곡을 바로 잡으려고 이런 이야기를 드립니다.

어쨌든 적어도 박 회장님이 안 계셨으면 그 당시의 단체도 그렇고 법안도 그렇고 그 중심을 재야로부터 끌어줄 분이 과연 계셨겠는가? 그것은 우리가 솔직하게 다시 한 번 평가를 해야 할 부분이고, 그리고 그 부분이 박재일 선생님이 한창 활동을 하던 젊은 시절이 아니라 완숙한 지도자로서 그 위치에 계실 때였기에, 박 회장님의 경험과 카리스마가 다양한 단체들의 입장차 같은 것을 다 품어 안을 수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지금은 환경농업분야나 단체들에 그런 카리스마들이 오히려 더 부족해지고 요즘에 제가 묘하게 아이쿱과 관계를 맺다 보니까 아이쿱, 흙살림, 한살림, 사실 이들 사이의 관계가 좀 어지럽거든요. 이걸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하고 마지막에 찾아뵙고 상의 드린 적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과제가 남아 있는데 그만 돌아가셨어요. 아쉽고 안타까운데 그 분의 유지를 받들어서 제대로 된 환경농업을 했으면 합니다. 그런데 우선 환경농업정책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관계부터 진실대로 기록을 정확하게 하고 역사에 남기고 미래를 열어가야 하지 않겠나, 그것이 저희들이 박 회장님의 뜻에 보답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거듭 이런 자리에 저를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회: 오히려 참석해 주셔서 저희가 감사합니다. 자연스럽게 최양부 선생님께서 그동안 빠진 역사의 기록이라든지 환경농업단체연합 결성이나 법제정 과정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박재일 회장님이 초대 회장을 한 환농연의 조현선 회장께서 말씀을 해주시죠.

조현선: 박재일 회장님과의 개인적인 인연은, 제가 1982년에 가농에 가입을 했습니다. 그 때 회장님이었으니까, 회장과 회원과의 관계가 하느님처럼 멀었습니다. 저는 한동안은 종교가 뭐냐고 하면 가톨릭농민회라고 했습니다. (웃음)

서형숙: 저희도 한살림이라고 합니다.

조현선: 개인적으로는 가톨릭 농민회를 만나고 나서 좀 더 자신 있고 당당하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뭐 이런 생각을 하고, 그래서 좋은 인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개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말씀하셨지만 박 회장님의 듣는 자세, 듣기가 참 힘든 것이잖아요. 제가 회장님하고 개별적으로 인연은 맨 처음에 1986년도 제기동에 한살림농산 쌀집을 낼 때 제가 친환경만 한 게 아니고 경기도 쌀도 취급을 할 때, 저보고 실어오라고 해서 제가 2년인가 얼마동안 실어 날랐습니다. 가면 가게 안에서 두 양반이 여름에 쌀을 찧어서 올라가면 문을 열어놓고 선풍기를 돌립니다. 그래야 바구미가 덜 나고 상하는 걸 방지하거든요. 그런 기억들이 있고, 환농연 활들을 하면서 환농연이 지금도 아주 복잡합니다. 30여개 단체들이 소비자단체 생산자단체, 고집이 보통들이 아니거든요. 1994년 11월에 환경보존형농업 생산자소비자협의회라는 이름으로 길게 붙여서 소비 진영 생산자 조직들이 함께 만나서 여러 가지 과정들을 거치면서 환경농업단체로 연합회를 사단법인화 시키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것을 조정을 하는 게 어려운 일이었죠. 부침이 많았습니다. 단체들이 나갔다 들어왔다. 이런 여러 가지들이 많은데 그런 것들을 회장님이 다 조정을 하셨고, 그리고 제가 환경농업단체 회장을 맡은 뒤에는 회장님한테 많은 자문을 했습니다. 일이 있을 때마다 그분은 전국단위로 일을 하셨지만 저는 그저 현장에서 올라와 부족한 게 많아요. 그리고 아이폼(국제 유기농업운동 연합 IFOAM International Federation of Organic Agriculture Movements) 총회 유치할지 말지 논란이 많을 때, “하는 게 옳다, 우리가 아이폼 규정도 따라야 하는데, 그들과 교류해야 하고, 유치하는 게 옳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국민들이 유기농업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설사 유치가 안 되더라도 사람들하고 교류하는 것도 큰 성과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 때 당시 필리핀, 대만, 한국 이렇게 유치전이 치열했었는데 총회가 열리고 있던 이탈리아에 가는 것이 좋겠다 결론을 내리고 환농연이 갔습니다. 이때 보름동안 함께 활동을 하면서 늘 보고 드리고 자문을 구했습니다. 회장님이 계시는 것 자체로 의지가 되었고 큰 존재감으로 역할을 다해주셨습니다.

특히 환경농업에 있어서는 정농회 등 민간에서 해온 일을 제도적 법적인 기반을 만들어 유기농업을 전체농업의 1%로, 친환경 농업을 10%정도를 끌어올리게 하는 성과를 내셨습니다.

(법을 만들고 담당부서를 만드는 일에) 농림부가 잘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환경농업단체가 소비자 단체와 같이 있고, 자조금 제도라는 게 있는데 친환경 자조금이 있습니다. 그런데 환경농업은 농사 방법일 뿐 특정 품목이 아니니까 대상에서 제외하려는 거예요. 박재일 회장은 친환경도 품목으로 보고 정부도 지원하라고 말씀하셨고 2006년부터 자조금이 들어오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박 회장님이 쐬기를 박아두셨기에 계속 유지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모로 친환경 농업을 제도적으로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를 하셨습니다.

끝으로, 환농연이 참 어려운데, 두 가지 말씀해주셨습니다. 회장님이 애송하셨다는 조동화 시인의 ‘나 하나 꽃 피어... ’ 하는 그 시를 저는 열 번도 더 읽었습니다. 그랬더니 혼자라고, 작다고 해도 기죽지 말아라 힘 모이면 잘 되는 거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또 한살림답게! 라는 말을 하시는데 한살림답게가 뭔가 생각해봅니다. 환농연이 여러 가지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한살림이 적극 참여할 때는 환농연이 잘 됐습니다. 한살림답게의 진정한 의미는 작지만, 작고 못 배웠지만 못살지만, 그들과 함께 참여하고 도모하고 끌고 나가려고 하던 한살림의 자세, 그런 것들이 ‘한살림답게!’에 맞는 정신이 아닌가
박재일 회장님 돌아가신 때에는 경황이 없어서 한살림만의 이름으로 장례를 치렀지만 추모의 밤에는 가농이나 흙살림과 같이 했으면 싶었습니다. 그 분은 한살림만이 아니라 (친환경농업전체의) 큰 어른인 데 같이 그들과 다 같이 했으면 좋았겠다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박재일 회장님은 듬직한 맏형이고 맏 오라버니 같은 큰 스승이 아닌가, 그러나 생각은 늘 청년 같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박재일 회장님이 한 10년만 더 사셨으면 성인 반열에 올라가실 분인데, 한 하늘 아래서 함께 숨 쉬고 이야기 나눈 것만으로도 저는 개인적으로 행복했습니다. 이렇게 마치겠습니다.

사회: 아쉽습니다만, 이만  마무리하겠습니다. 마치면서 두 가지 에피소드 소개하고 싶습니다. 누구말도 안 듣기로 유명한 김지하 시인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자기가 세상에 누구말도 다 안 믿지만, 인농이 말하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는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인농仁農이라는 호는 그동안 밝히지 않았습니다. 무위당 선생에게 받았는데 안 썼습니다. 10여 년 전에 한국일보에 내가 기억 하는 사람이라는 글을 쓸 때 호가 있으면 말씀해주시오 하니 그 때 무위당 선생이 주신 호가 있다고 인농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무위당이 주신 인농이라는 호처럼 정말 이 시대의 어진 농부로 산 게 아닌가 그래서 묘비문을 쓸 때 이런 말을 넣어서 정리를 해봤습니다. “그는 한 평의 논밭도 갖지 못했지만 어느 누구보다 큰 우리시대의 농사꾼이었다. 자신을 갈고 세상을 갈아서 한살림의 큰 밥상을 마련한 사람이다.” 그가 잘 부르던 노래 등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제한돼 다 나누지 못했습니다. 오늘 말씀해주신 것을 바탕으로 정리하고 좀 더 깊게 여러분들이 품어왔던 생각들을 정리하는 기회를 따로 마련되었으면 합니다. 바쁘신데 자리해주신데 자리를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