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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농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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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지키는 살림살이 강원도 김화의 어느 농민은 요즈음 고민에 빠져 있다. 아버지와 싸워가며 농약을 치지 않고 벼농사를 지었으나 쌀이 팔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벼가 95% 정도 익었을 때 수확했다. 이 때 수확한 벼가 가장 밥맛이 좋다. 물론 벼가 완전히 익었을 때 수확했다면 수확량이 5%나 더 증가할 뿐만 아니라 쌀의 모양도 꽉 찬 듯이 보여 팔기가 쉬웠을 것이다. 땅을 살리고 먹거리를 살리기 위해 이렇게 농사를 지었는데 웬걸 소비자가 알아주지 않는 것이다. 낱알이 왜 이렇게 싸라기 같느냐, 왜 색깔이 누렇느냐 하며 외면해 버린 것이다.황토에서 누런 쌀이 나올밖에... 그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집부리며 농사지었던가 하고 후회가 되었다. 전남 광주의 한 농민은 지난 해 밭에서 썪어가는 무를 보고 속을 태워야만 했다. 무..
한살림 큰 농부 -인농 박재일 평전 “생명살림의 길에서 만나는 우리 안의 어진 농부” “사람과 자연이 함께 사는 한살림, 생협운동을 이끈 박재일 선생” 6.3 운동의 주역, 원주 사회개발위원회를 거쳐 한살림운동을 시작한 인농 박재일 평전. 우리나라 유기농 친환경농업, 생활협동조합운동을 일군 박재일의 삶을 조명한 책입니다. 평전은 2017년에 펴냈습니다. 1982년 2월 14일 제 13차 가톨릭농민회 총회에서 6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 “농업이 보호되고 농민의 인간적 존엄성과 생산자로서의 권익이 실현되는 것이 농촌사회의 복음화와 사회정의 구현이라는 평소의 소신 때문에 이 부름에 응하였습니다.” (167쪽) 가게를 얻고 개업 준비를 위해 뛰어 다니던 그 무렵이었다. 1호선 전동차가 종로5가역을 막 출발할 즈음, 분주한 인파 속에 ..
고 인농 박재일 회장을 기리며 함세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생명농업의 선구자 박재일 회장이 지난 8월 19일에 선종했습니다. 신앙과 사회적 관점에서 저는 고인의 삶을 다음과 같이 기립니다. 경북 영덕에서 10남매 중 5남으로 태어난 그는 대학 재학 중인 1964~65년 한일협정반대 시위 주도로 옥고를 치르면서 생의 큰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65년 이옥련 님과 결혼한 그는 옥중에서 첫 딸의 아버지가 됩니다. 졸업논문을 마무리하기 위해 서울에 간 남편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부인은 전혀 놀라지 않은 채 남편이 선택한 길과 삶은 언제나 옳다고 확신했으며 이 신뢰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한결 같았습니다. 박재일 회장은 딸 다섯을 낳아 아름답게 키운 아버지이며 부인을 사랑하고 딸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실천적 페..
인농 박재일 선생 연보 1938년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사암2구에서 태어남 1959년 2월 경북고등학교 졸업 1960년 3월 서울 문리대 지리학과 입학 1964년 한일협정 반대시위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등과 함께 시위 주도 계엄령 발동, 도피생활 시작 1965년 3월 이옥련 여사와 결혼 1965년 한일수교협정이 조인되고 반대시위가 격화되면서 구속 1969년 8월 김지하 시인의 권유로 원주로 내려가 장일순 선생을 만나고 진광중학교 영어교사가 됨 1971년 진광중학교 내의 협동교육연구소에 합류하고 학교내 신협 창립에 참여 1972년 8월 집중폭우로 남한강 일대 대홍수가 벌어져 수재민을 지원하기 위한 사회개발사업에 동참 1973년 가톨릭농민회에 참여 1981년 재해대책 실무자들과 일본생협, 생활클럽, 대만 원주민소협 등 방문 ..
仁農 박재일 선생의 생애 박재일 선생은 1938년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사암2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 서울대학에 입학한 청년 박재일은 4·19혁명에 참여하고 1964년 굴욕적인 한일수교에 반대하는 6.3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둔 시점에 평생의 반려인 이옥련 여사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민족의 요구에 반하는 한일협정이 비준되고 국민적 저항이 다시 번지자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는 그를 연행해 혹독한 고문 끝에 구속시켰고 신혼의 아내가 첫 아이를 잉태한 채 그를 옥바라지 해야 했습니다. 감옥을 나선 뒤 박재일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만나고 1969년 강원도 원주에 내려가 사회개발위원회, 가톨릭농민회에 참여하며 협동과 자조운동에 매진하며 우리 농업과 농촌 현실을 개혁하고자 힘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