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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강연 2011.09.14 17:15 Posted by "한살림답게!" 인농박재일 한살림연합소식

- 박재일 회장이 들려주는 무위당 이야기

 

* 이 글은 2002년 당시 모심과살림연구소 윤형근 사무국장이 무위당 선생과 함께한 ‘원주시절’에 대해 박재일 선생과 대담한 내용으로, <무위당사람들> 소식지에 실렸던 것입니다.

윤형근 : 『나락 한알 속의 우주』나 『노자이야기』와 같은 이야기 속에서 저희 젊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무위당선생님은 생명사상을 실천하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인데요. 하지만 생명사상이 나오기까지는 오랜 활동의 경험과 고뇌가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박재일 회장님께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신용협동조합운동, 농민운동, 원주교구 사회개발위원회의 지역사회개발운동, 가톨릭농민회, 원주소비자협동조합, 한살림 활동 등 무위당 선생님과 보조를 같이 하면서, 무위당 선생님이 나타나지 않고 물러서 계시는 입장이라면, 박 회장님께서는 항상 앞에 나서서 활동을 하셨는데, 그 과정에서의 경험과 고뇌, 그리고 장선생님과 함께 하셨던 과정들을 듣고 싶습니다. 특히 박 회장님께서는 원래는 원주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셨는데, 언제, 어떻게, 왜 오시게 되었고 원주랑 인연을 맺으시게 되었는지 먼저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박재일 : 1965년 무렵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운동 등으로 학원가가 매우 시끄러울 때인데, 김지하 시인의 소개로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되었는데, 그 때 기억으로는 선생님께서 참 편안하고 인자하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주 자연스럽고 포용력 있는 모습으로 맞아 주셨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몇 년 후에 원주로 오게 되었는데, 무슨 운동을 할 목적을 하지고 원주에 온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 일원이 되어 살아보고 싶었을 뿐이었고, 소도시이면서 농촌지역사회였다는 점도 들 수 있겠죠.

4.19혁명과 5.16쿠데타를 거치고 군대 갔다와서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 투쟁으로 옥에 갔다 나오니 학교에서 벌써 졸업이 되어버려 학생 신분이 아닌 거예요. 사회에 나와 직장을 구하기도 어렵고 여러 가지로 활동에 제약이 많았어요. 그래서 고향에 돌아가 몇 년간 농사를 짓게 되었는데, 이 농사라는 게 아무나 짓는 게 아니예요. 나에게 농사를 가르쳐 준 이웃 친구들과 똑같은 시기에 똑같이 씨뿌려 똑같이 가꾼 내 땅에서 자라나는 농작물(배추)이 서로 다른 거라. 나오는 싹이 다르고, 자라나는 모습이 다르고 수확 때의 결실이 달라. ‘야 이거 농사라는 게 그냥 뿌리고 가꾼다고 되는 게 아니구나!’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농사를 지을 역량을 갖지 못했구나”를 절감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정착하지 못하고 있을 무렵, 원주에서 연락이 왔어요. 1968년으로 기억하는데, 장 선생님께서 김지하 시인을 통해서 연락을 주셨는데, 내려와서 보니 당시 천주교 원주교구에서 세운 진광중학교에 교사로 부르신 거라. 자세한 영문도 모른 채 원주로 와서 다음 날, 당시 단구동 종축장 자리에 있던 진광학교로 가서 장화순 교장선생님을 만나 면담을 하고 허락이 되었는데, ‘내게 교단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고민하면서 진광학교에 근무하게 되었어요. 그때 무위당 선생님이 내게 “잘 왔다. 우리 같이 살자.” 하시면서 맞아주시더라고요.

윤형근 : 회장님도 6.3사태 등 학생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시기도 하셔서 상당히 혈기왕성하셨을 때인데, 무위당 선생님과 만나실 무렵 회장님의 사회나 운동에 대한 생각은 어떠하셨나요?

박재일 : 글세, 독재를 반대하고 민주화를 열망했지만, 학교를 떠난 몸이라 무슨 역량이 있어야지, 생각뿐이었지. 그저 열심히 살아보는 수밖에....... 

윤형근 : 처음에는 사회운동이나 이런 것을 목적으로 오신 것이 아니네요. 신협운동, 지역사회개발운동 등의 구체적인 활동들은 언제부터 같이 하시게 되었나요? 

박재일 : 원주에 오기 전까지는 협동적인 삶에 대해서 관심은 있었지만, 협동조합운동에 대해 문외한이었어요.

당시 가톨릭센터에서 무위당 선생님께서 ‘협동조합강좌’를 열고 계셨는데, 학교가 끝난 후 자연스럽게 참가하게 되었어요. 이 협동조합강좌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협동조합운동에 관심과 매력을 느끼게 되었고 민의 자발적 협동조합운동의 일환으로 ‘신용협동조합’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지......

그 당시는 농촌에서 부락 공동기금의 부정한 사용, 장리쌀, 고리 사채 등이 성행하던 시절이라 서민들의 삶이 피폐하고 어려웠던 시절인데, 불신도 극심했었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려운 사람들끼리 십시일반으로 서로 돕고 자립하는 길을 모색하여 함께 살아보자는 이 신협의 정신에 큰 매력을 느끼게 되 거지.

나는 당시 학교에 근무하면서 일과가 끝나면 저녁에 주로 가정 방문을 많이 다녔는데, 학교에서도 권장했지만 이게 아이들 가정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정말 필요한 거야. 밥을 못 싸오는 아이들, 수업시간에 견디지 못하고 조는 아이들, 다 가정을 찾아 다녀보면 그 이유가 있는거라. 이 가정 방문을 다니고 학부형들을 만나면서 가난한 가정들의 실체를 직접 접하고 알게 되었고 아이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

당시 신협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조합원 교육을 철저하게 했어요. 탄탄하고 만만치 않은 교육을 다 마친 후 교육받은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조합 결성 여부를 결정했어요.

또 신협운동을 하겠다는 사람들을 지도하는 자원봉사자가 되려고 해도 교육을 받아야 됐어요. 그래서 협동교육연구원에서 실시하는 21일간의 단기지도자교육을 받았어요. 교육을 받고 자격을 얻어 장상순 씨를 따라 활동을 하게 되었고, 그때 지금 관설동에 있는 세교 신협을 창립하게 되었지. 다 농민들이라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그들과 같이 공부하고 하면서 신협을 준비했지. 그리고 호저면 영산에서도 신협을 만들기도 했고......

그 무렵에 진광학교에 ‘협동교육연구소’가 생기고 장상순 선생이 소장으로 혼자서 그 일을 맡게 되었는데, 이 때 내가 자청을 했어요. 교단에 계속 있는 것보다 이 신협 일이 내 일이라고 생각한 거야. 그래서 교장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협동교육연구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최초로 만든 ‘학교소비조합’의 일도 거들게 되었지. 이게 아마 우리 나라 최초의 학교 소비조합일텐데.

아침에 도시락 하나 싸가지고 나가면, 대중교통인 시내버스 타고 우선 종점까지 가서 다시 시내 쪽으로 걸어내려 오면서, 모내기도 거들고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 얼굴을 익히고, 새참 나눠먹고 막걸리도 얻어먹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협동적인 삶과 협동조합의 필요성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하면서 홍보도 하고 그랬어요.  

윤형근 : 무위당 선생님은 국립서울대 설립안 반대, 도산 선생의 뜻을 이어받은 대성학원의 설립, 1956년 통일사회당/1960년 사회대중당 참여, 중립화평화통일론을 주창하셔서 옥고를 치르는 등 통일운동, 정치운동, 교육운동에 전념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박회장님께서 보시는 무위당 선생님의 정치의식, 통일에 대한 생각은 어떠셨나요? 또 무위당 선생님은 주로 교육에 전념하시면서 뛰어난 의식화 전도사라는 평도 들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박 회장님이 보시는 무위당 선생님은 어떠셨나요?

박재일 : 선생님은 이래라 저래라 하시는 분이 아니셨어요. 가만히 옆에 계시면서도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노력들을 생성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시고, 후배들이 실천해 나갈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해 주신 분이지요.

4.19혁명, 5.16쿠테타, 굴욕적인 한일회담반대투쟁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동기에 분노와 좌절로 몸부림치던 나를 품어준 곳이 바로 선생님이 계신 원주였어요. 선생님과 원주 사람들, 지역사회가 함께 협심하여 자기가 살고 있는 삶터를 좀 더 인간적인 삶이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자발적으로 협동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실천한 것이지.

선생님의 말씀 중에 기억나는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나뉘고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생이 학생이 되기도 하고 학생이 선생이 되기도 하는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관계이다.” 즉 환자와 의사의 관계에서도 의사가 일방적으로 환자에게 시혜를 베푸는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의사를 찾아 온 환자가 ‘어데가 어떻게 아프다’고 의사에게 일러주는 과정에서는 환자가 선생이고 의사는 학생이 되고, 진료하는 의사가 환자에게 이렇게 저렇게 치료해주는 과정, 이때는 의사가 선생이 되고 환자는 학생이 되는 것처럼 다 서로 가르쳐 주고 배우는 상호 작용이다 이거야. 따라서 교육의 본질은 인간다운 삶을 함께 배우고 느끼는, 하나의 공간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의식의 상호 공유 작용이라고 볼 수 있는 거지. 또 전쟁의 예를 들자면 장수 혼자 잘나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많은 병사들이 함께 힘을 합쳐 잘 싸워주기 때문에 이길 수 있는 거라. 그 공을 장수 한사람에게 돌려서는 안 되는 거지. 우리 교육이 특별히 뛰어나거나 잘 난 몇 사람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서로 존중받고 주체적으로,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마음가짐과 인격을 키우는 교육, 서로 협동해서 잘 살아갈 수 있는, 나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교육이 되어야지. 선생님은 그걸 강조하셨어요. ‘의식화’하면 이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이상하게 보는 시대가 있었지만, 선생님은 자기 스스로 옳고 그름을 깨달을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주시고 조언해 주신 분이지. 이거다 저거다 일일이 설명해 주시고 주입하신 것이 아니라 항상 곁에 있으시면서 큰 말씀 없이 우리에게 깨달음의 가르침을 주셨어. 우리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셨지. 어느 누구도 내치지 않으신 분이야. 감싸고 포용하시면서 그 편안함 속에서 옳은 길이 무엇인지를 자기 스스로 깨닫고 실천하게 해 주셨지. 선생님은 진정한 자유와 평화, 그리고 민주적이고 온전한 삶은 통일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점을 늘 일깨워주시고, 인간간, 지역간, 민족간, 나라간 나아가선 인간과 자연간의 조화와 통일을 일러주시곤 했지. 천지(天地)는 내 부모요, 내 안에 천지가 있다는 생각이랄까?

또한 “혁명은 보듬어 안는 것”이라 하신 선생님은 소외되고 가난하고 억압당하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연민의 정이 많으셨고 그들과 함께 하시고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구시지 않으셨나 생각이 들어요. 

윤형근 : 원주의 사회 운동들이 1972년 남한강 유역 대홍수 이후 큰 전환점을 맞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재해대책 사업이 어떻게 전개되고, 이 때 무위당 선생님께서는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요? 

박재일 : 1972년 8월 19일 집중폭우로 강원도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지요. 당시 자료에 의하면 3개도 13개 시군, 87개 읍면에 피해액 187억원에 이르렀지요. 그래서 피해를 입은 수재민을 돕기 위해 천주교 원주교구에서 전 세계에 호소하여 독일 쪽에서 지원이 오게 되었어요. 그래서 원주교구에 ‘재해대책사업위원회’을 구성하고, 어떤 식으로 재해민들을 도울 것인가 정책을 결정하고 실제로 현장에 투입되어 지원사업을 펼치는 집행위원회로 나눠서 지원 사업을 진행하게 되요. 그 때 집행위원회 위원장을 김영주 선생께서 맡게 되고, 이경국 형제가 광산 지역을, 나는 주로 농촌 지역을 맡아서 정인재, 김상범, 홍고광, 박양혁, 장상순 등 여러 분들과 본격적으로 수해 지역 지원사업을 펼치게 되지요. 이것이 내가 농촌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삶을 살게 된 출발이랄까.......

먼저 실태를 알기 위해서 현지조사를 한 후 구체적인 지원방안 등을 세우고 시작되었는데, 몇 가지 원칙을 정했어요. 첫째, 식량 지원이 우선이었지. 농민들이 가을에 수해가 났으니 당연히 그해 농사를 망친 거고 다음해 수확기까지는 먹을 것을 확보하는게 급선무였지. 두 번째는 흙이 떠내려가 황폐해져 버린 농토를 복구하는 사업이야. 농지가 복구되야 다시 농사를 지을 것 아냐. 그리고 세 번째는 농민들의 소득원을 개발하는 문제, 그런데 이 모든 지원 과정에서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수혜가 아니라 재해를 당한 농민들을 그 모든 작업 과정에 함께 참여시켜, 그러니까 자기 몫의 일을 담당하게 하는 거지, 그래서 식량지원사업도 소위 품삯 등의 명목으로 당당하고 떳떳하게 지원받도록 하는거야.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구호가 아니라, 절망에 빠진 그들이 스스로 자립의 의지와 자신감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지. 처음에는 힘든 상황이니까 그냥 도와줄려면 도와주기나 할 것이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한다고 귀찮아하는 눈치도 있었지만 차츰 그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능동적으로 의욕을 가지고 참여하기 시작하더군. 특히 동일한 작목을 할 수 있는 생산협동체를 구성하여 협동 작업이 가능하게 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는 ‘생산협동 조직’을 구성했고, 이런 저런 협동체들이 모여서 마을 총회를 구성하여 마을의 일들을 민주적이고 협동적으로 처리했어요. 그때만 해도 유신 시절이라 마을민들이 자꾸 모이는 것 자체가 관련기관의 주목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농민들은 생각이상으로 자기네들끼리 큰 다툼 없이 대상 분야를 조정하고 결정하는 등 하나의 자율적인 일 처리, 자기 조절 능력을 발휘했어요. 또 생산된 작물, 농자재 등 수송도 문제라, 당시만 해도 운송 수단이 별로 없을 때니까, 수송 수단으로 경운기 지원사업이라든가 또 탈곡기, 건조기 등 시설 등을 지원해서 공동 사용해야 하는데, 그런 기계, 시설 등을 관리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마을민들 중에서 선정해서 일종의 ‘이용협동조직’을 구축하는 거지. 이런 모든 활동들을 현지에서 펼쳐나가면서 한 달에 한번 정도 원주에 모여서 그간에 진행되는 활동 상황이나 결과 등을 서로 보고하고 점검하고 그랬어요. 그런 때도 항상 선생님께서 그 자리에 나오셔서 우리들 얘기를 쭉 들어주시고 했었지. 선생님 계신 자리에서 우리끼리 이야기하고 토론도 하고 하다보면 선생님께서 긴 말씀 안 하셔도 바람직한 방법들을 우리 스스로 찾아나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부락 단위로 이렇게 협동 조직이 구성되고 운영해 나가다 보니까, 기금도 생기고 그것을 잘 관리할 필요성이 대두된단 말이야, 협동 공동체를 운영해 나가는 기금을 만들고 운용하고 관리하기 위해 ‘신용협동조합’의 필요성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거지. 필요한 교육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가면서 주민들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 신용협동조합이 구성되게 돼요. 내가 알기로는 그 당시에 농촌과 광산촌에 대략 74개의 신용협동조합이 창립되었지.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공부하고 고민하면서 신협들을 만들어 가니까 자발적 조직으로 활성화된 거야. 어렵고 가난한 마을민들이 푼돈을 모으고, 또 집집마다 어렵지만 조금씩 조금씩 모아 두었던 얼마 되지 않는 돈이라도 출자해서 신협을 세우고 통장을 갖게 되고 하니까 자부심도 생기는 거지. 당시에 관련을 맺고 활동한 지역이 3개도 13개 시군, 47개 읍면 129개리(농촌), 17개 광업소(광산)이었어요.

또한 농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생활에 필요한 공산품 등의 물자를 외부로부터 사와야 되요. 식량의 생산 공급뿐만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물자의 구입 소비도 함께 이루어지는 거예요, 농촌이나 광산촌의 공산품 가격이 도시보다 20~30% 높았지요. 그래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따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지. 이런 인식 속에서 도시민, 농민이, 그리고 생산자, 소비자를 구분하지 말고 바른 먹거리를 생산하고 바르게 유통하고, 안전한 공산품을 만들고 제대로 공급하고 하는 과정이 전부 구분되거나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다, 이런 생각아래 신협뿐만 아니라 소비자협동조합운동도 진행된 것이지요.

협동 조직의 다양한 형태들, 즉 신협, 소협들 이 중에서 지역의 여건이나 특수성 등의 조건에 의해 전문화된 형태로 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지. 주민(시민)들이 서로 협동하면서 조화롭고 인간적인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이 바로 협동조합운동이예요. 이건 또한 자발적인 민주화 운동이기도 하지. 자치, 자율, 자기조절능력을 갖춘 한 사람 한 사람이 힘을 합쳐서, 일방적인 지원 체제가 아니라 당당한 상호부조체제를 만들어 가는 것이 협동조합의 정신이예요. 마을에 여러 개의 작은 협동체(생산․이용)들이 조직, 운영되면서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조직이 생기고 마을의 모든 일들이 민주적인 회의를 통해서 결정됨으로써 민주적이고 협동적인 마을로 변해갔지. 점차 마을들이 연대해서 횡성 강림지역, 영월 연남지역, 평창 대화지역 등 지역협동운동이 태어나고, 소협, 농촌협의회, 광산협의회 등 보다 광범위한 협동운동으로 발전해 갔지요.

윤형근 : 그 무렵, 민청학련이나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 김지하 시인 사건 등이 복잡하게 얽혀서 참 어려운 시절이었을 텐데, 이 원주의 민주화운동과 재해대책사업은 어떤 관계였습니까?

박재일 : 농촌에서 재해대책사업(나중에 사회개발위원회로 바뀜)이 진행되면서 마을단위별로 농민들 스스로가 민주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다양한 조직들이 생겨났고, 자신감도 형성되었지. 그런데 당시 정부에서 보면 이게 불안한 거라. 마을이나 신협에서 민주적으로 투표하여 대표를 뽑고, 수시로 모여서 작목반회의 등을 하니까 걸핏하면 와서 감시를 하고는 했는데 뭐라고 딱히 꼬투리를 잡기가 어려워서 난감해하곤 했어요. 그런가하면 농민들은 자신들이 심고 싶은 종자를 심으려고 하는데 면에서 나와 일반 벼 못자리를 엉망으로 만들고 일방적으로 통일벼를 심도록 강요하고 하니까 농민들이 반발하게 된 거예요. 결국 이러한 억압적인 강제 등이 개선되지 않으면 안되겠다. 즉 사회의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싹트고 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된거지. 당시에 원주를 중심으로한 가톨릭농민회의 활동은 대단했어요.

한편 광산촌에서도 조합활동 등을 통하여 민주적 의식을 가지게 된 친구들이 앞장서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중에 김지하 시인 등이 참여한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나고 지학순 주교님이 구속되었지요. 상황은 긴장의 극치라고나 할까? 언행일체, 모든 활동이 엄중한 감시 속에서 진행되었지요. 이때처럼 긴장 속에서 나날을 보낸 적이 없어요. 공작적 조작이 난무하던 시대이니까? 그때부터 우리들은 농촌에서는 지속적으로 해오던 사업들을 진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지학순주교 석방을 위한 운동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고 했으니 정부에서도 정신이 없었지요. 동에 번쩍하고 서에 번쩍하니까.

1974년 민청학련 사태를 전후하여 농촌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병행해 가며 상당한 긴장(그게 스트레스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보면 활동가로서의 의무감, 책무라고 할 수 도 있어요)을 늦추지 않고 모두들 열심히 활동들을 했지요. 혼자서 잘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야 내버려두어도 잘 살 수 있지만 약한 자,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기 위해선 서로서로 도움이 필요하거든. 마침 또 나 같은 사람은 이런 저런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고 하는 것이 직업인데 이런 일을 마음놓고 하고 다닐 수 있도록 건실하게 뒷받침해준 것이 집행위원장 김영주 선생이고, 지 주교님이시고, 천주교 원주교구이고, 원주의 많은 분들이었는데 이 모든 일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중심을 지켜나간 분이 장일순 선생이었어요.

윤형근 : 제가 들은 바로는 무위당 선생님이 몽양 여운형의 영향도 많이 받았고, 농민운동가들에게 강의하실 때에는 마오의 모순론을 그렇게 쉽게 강의하시던 분이 없었다고 들었는데... 발표된 자료는 아닌데 , 김지하 시인 인터뷰에는 그 무렵 원주는 농업사회주의를 지향하고도 있었다고도 한 것 같은데 얘기를 들어보면 무위당선생은 무슨 사상을 앞에 세우고 그에 따라 움직였다기 보다는 밑바닥의 일들을 하면서 부닥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사상들을 적용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 같구요. 이런 점에 대해서 박선생님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박재일 : 무위당 선생이 딱히 어떤 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그 분은 다양한 사상과 교감을 나눈 분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아요. 사실 그 무렵에 내가 활동을 하면서 자주 선생님을 접할 때마다 궁금했던 것 중에 하나가 도대체 이 양반은 어떤 주의자일까 하는 것이었는데 통 모르겠단 말이에요. 사람이 어떤 카테고리 안에 잡혀야 이해하기가 쉬운데 이 양반은 잡히지가 않아요. 하지만 행동이나 말씀하시는 데에는 늘상 수긍가는 당위가 있었단 말이에요.

만인의 관계가 교사와 학생이 고정된 일방적 관계가 아니듯이 사상이니 주의니 하는 것과 인간의 관계도 끊임없이 주고받는 관계라고 할 수 있어요. 장일순 선생도 어떤 특정 사상의 추종자라기 보다는 다양한 사상과 열린 자세로 만났던 분입니다. 그러한 만남과 관계 속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끊임없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 분이지요.

당시의 활동에 대하여 농업사회주의라고 보는 분들이 있는데 무위당선생님이 농업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에요. 그런데 1차산업, 2차산업 할 때의 경제학적 의미에서의 농업을 말한 것이 아니라 農 그 자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많이 하였지요. 農은 인간의 삶과 가장 기본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요. 자동차니 건물이니 옷이니 하는 것들은 없어도 불편하기는 하지만 사람이 못살게 되지는 않지요. 하지만 農은 다르단 말입니다. 없어선 안된다는 말씀이에요. 그 무렵에 선생님이 내게 주신 글씨가 食以爲天이에요. 의식주라는 생존의 필수 조건들을 창조해 내는 것이 농업이란 말입니다. 바로 농업은 인간 생존의 근본자리에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농업문제를 바르게 하려는데 많은 관심을 쏟았고, 관련된 사상들을 생각하셨겠지요. 그러나 이 양반은 그러한 사상들을 항상 당신 것으로 소화해내었다고 생각해요.

나는 난 치는 것을 잘 모르는데 선생님의 난을 보면 일반적인 난하고 많이 다르지요. 이게 꼭 사람 얼굴인데 어떤 것은 웃는 모양이고 또 어떤 것은 묵상하는 듯하고 그러잖아요.

윤형근 : 농촌개발사업이 진행과정에서 많은 성과를 남기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려워지게 되었잖아요. 어떤 문제 때문이라고 보시는지요.

박재일 : 두 가지 원인을 말할 수 있겠는데 우선은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는데 교육도 해야하고 사람도 쓰려면 비용이 드는데 수익이 발생되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에요. 협동조합의 경우는 자체적으로 수익을 창조하는 사업을 진행하지만 사회개발위원회는 갈수록 일은 늘어나는데 재정문제를 해결할 제도적 뒷받침이 없었단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정부에서 하고 있는 공공복지사업을 주관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사례가 될 것입니다. 주민들이 민주적으로 참여하게 하고 또한 공정하게 사업을 집행하면서 신뢰를 얻고 했던 과정에서 공공사업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유는 사람문제예요. 농촌개발이니 하는 것도 모두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것인데 일단은 사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요. 그런데 74년부터인가 강원도에서는 사실상 강제이주가 시작이 되요. 예를 들면 화전민 정리가 있는데, 일정 고도 이상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이주시킨 것이고, 그 다음에 젊은 층들이 일을 찾아 공장으로 도시로 옮겨가지 시작했지. 그리고 전국적으로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환경개선사업이 진행되었어요. ‘초가집을 스레트지붕으로 바꾸자’, ‘토담집을 벽돌집으로 바꾸자’ ‘취락구조 개산사업이다’ 뭐 이런 것이었는데 여기에서 정부보조를 받았는데 자부담이 있었어요. 자부담은 그 농가에서 지불해야돼. 가뜩이나 사채, 고리채로 빚더미에 있는데 자부담은 더 큰 부담이 된 것이에요. 그뿐인가? 요즘에도 그렇지만 소를 키우면 소값이 폭락하고 농산물을 생산하면 판로보장이 안되는 거라. 이런 부분들이 정책적으로 뒷받침이 안되다보니 농업을 기반으로 살아갈 수가 없는 거라. 작목반도 만들고 해서 열심히 농사를 지었는데 죽도록 일만하고 소득을 못 올리는 꼴이 된거예요. 부락들이 연결이 되어 신협도 만들고 했었는데 이 부분들이 사람이 빠져나가니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정책 자체가 공업 중심, 도시 중심으로 가니까 농촌이 몰락하는 것이고, 농촌은 산업예비군으로 전락한 겁니다. 도시로 몰린 노동자가 저임금을 받고도 밥만 먹으면 일 할 수 있으니까 밥값을 낮추어야겠고 결국 저농산물 가격 정책으로 일관된 것이지요. 또 농촌에서는 저농산물 가격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증산을 해야 하고, 그러니 농약을 마구잡이로 뿌려야 하고 이게 바로 농업정책이었지.

또 광산촌의 경우는 석유가 주에너지원이 되면서 폐광이 되고 몰락하게 되었지요. 탄광노동자들의 생계가 어려워지고 하니까 동원탄광사건 같은 게 자연스레 일어나게 되었지. 그 당시의 원주를 보면 농촌, 광산 지역운동, 이창복 씨가 참여했던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 거기에 김지하 시인 등의 청년학생들의 민주화운동과 지학순 주교님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의 부정부패 반대, 사회정의 구현을 위한 사회 참여 등이 복합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천주교의 경우도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를 한 것이 이곳이 처음이었어요. 1970년대 천주교 원주교구와 원주는 나라의 민주화와 정의사회 구현에 아주 큰 몫을 했어요. 이것은 원주 시민의 역사적 긍지로 남을 것입니다. 거기에 장일순 선생님도 계셨는데, 우리의 삶의 양식이 제대로 가게 하려는 것이 선생님의 생각이었으니까 당연한 거지.

윤형근 : 그러다가 77년경이지요. “종래의 방향으로는 안되겠다”고 깨닫고 지금까지 해오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생명운동으로 전환하셔야 되겠다고 하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말씀을 들어보니 과거와 단절된 것이 아니네요. 그래도 그 방향 전환이라는 것이 운동을 보는 시각이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 같은데,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박재일 : 다른 부분은 모르고 농업문제만 가지고 이야기를 하자면 농민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억압구조를 깨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관에서 와서 못자리를 짓밟고 통일벼를 심으라고 으름장을 놓고, 협동조합이라는 게 민주적인 곳인데 농협에 강제로 출자를 하라고 강요하지를 않나 도대체가 말도 안 되는 짓들을 마구 하던 때였으니까. 농업이라는 게 생존의 기초인데 농민이 떠나고, 농업이 무너지고 나면 도대체 우리의 삶은 뭐가 되느냐 말이야.

그런데다 농업이 경제가치에 종속되다 보니까 비료, 농약 때문에 농토가 망가지고 환경이 파괴되고, 농민은 농약에 중독되고, 농산물이 독성에 오염되니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지. 사실 초기에는 기존의 농민운동적 시각에 따라 농민의 사회적 권익을 회복하기 위하여 억압구조를 깨야겠다는 생각에 머물렀는데 무위당 선생과의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그것만으로는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에요. 사회, 사물들 속에 있는 상생의 관계를 기초로 세계를 보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보게된 것이지요. 그 다음부터는 사회적으로 어떻게 이런 시각에 기초한 관계를 형성해 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딱히 생태농업을 하겠다는 생각이라기보다는 공동체성에 기초한 전통적인 농업의 원리에 의거하고, 그 안에 경제가치가 아닌 생태적 가치를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여기에 도시와 농촌이 협력과 연대를 통해 함께 가는 새로운 운동방식을 고민하게 된 거지요. 그리고 일본의 생협활동들에서도 많은 생각의 단초를 얻었지요.

도시와 농촌의 연대, 생산과 소비의 협력관계를 고려하면서 농산물 직거래운동, 유기농 직거래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런 운동을 무어라 칭할 것인가 고민이 많았어요. 원주에서 시작할 때는 협동조합이라고 했는데 일반적인 협동조합적 개념으로는 이상한 양식이지요. 생산자와 소비자가 모두 조합원이라, 조합원의 생활영역이 다른데...... 문제는 서울로 갔을 때인데 원주만 해도 밝음 신협도 있고 작은 지역이라 협동조합을 하기가 쉬웠는데 서울에서는 협동조합 만들기가 워낙 방대한 지역이라 어려운 문제였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공감하고 이런 내용을 담아낼 적절한 용어를 고민하던 중에 ‘한살림’이란 용어가 떠오르더군요. 한살림이 어떠냐고 하니까 장일순 선생님과 김지하 시인도 좋다고 하더군요.

인간의 심성은 메말라지고, 공동체성이 붕괴되고, 마음은 갈가리 찢어지고, 사람들은 돈, 물질, 과학기술의 맹신자가 되고, 생태․환경․자연파괴 등 온 상이 황폐화되고 있는데, 이는 물질주의적 산업문명이 이룩한 산업사회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의 근본적인 전환이 없는 한 인류의 건강한 미래를 바랄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선생님은 현대 산업문명의 문제와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인 문명 창출이 필요하다고 여기시고 생명운동으로 그 길을 잡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윤형근 : 원주 때와는 달리 허허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제기동에 쌀가게였던 한살림농산을 내시고, 일반 쌀가게도 아니고 쉬운 일이 아니어서 힘이 많이 드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때 무위당 선생님이 힘이 많이 되셨을 것 같은데..... 제 기억으로는 박 회장님이 힘든 일이 있으시면 늘 원주에 내려가셨지요.

박재일 : 1986년 6개월 정도 준비를 하고 서울에서 농산물을 도시소비자들에게 공급하기 시작한 것이 그해 12월 4일이었지요. 한살림농산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쌀가게를 시작한 거죠. 이 일을 시작하면서 같이 농민운동 했던 친구들, 노동운동 하는 친구들, 교회 분들 하고 상의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그 분들은 꼭 필요한 일이기는 한데 성공하기는 힘들 거다, 고생길이니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대부분의 반응이었어요. 그런데 선생님과 원주 분들과 의논을 해보면 그건 꼭 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성공을 전제하지 말고 해야 할 일, 필요한 일이니까 꼭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물론 고생길이 훤하니까 안타까워는 했지만, 해보자고 용기를 주시는 거예요. 그에 힘을 얻어서 겁없이 시작했어요. 농업도 제 모습으로 회복시키고, 농촌도, 농민도 긍지를 가지며 살고, 도시 소비자들도 건강한 밥상을 차리면서 농촌과 도시가 삶의 연대, 생활협동 관계를 만들어보자고 <한살림을 시작하면서>라는 취지문 한 장을 갖고 우리 사회에 얘기를 걸기 시작한 것이죠.

그때 우리 사회는 엄청난 격변기, 민주화를 위한 노력들이 거세게 이어지던 때 아니었어요. 그러니 서울 바닥에 올라와 쌀자루를 지고 석발기를 돌리는데, 몸과 마음은 길바닥을 향하는 거예요. 정작 소비자는 찾아오지 않고, 친구들이 찾아와서 지금 나라 일이 급하니까 이것부터 해결하고 나중에 한살림을 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소주도 많이 먹고, 문을 나섰다 이게 아니지 생각하고 돌아오곤 했어요. 어려움도, 갈등도 많았지.

그럴 때마다 내가 찾아갈 곳이 어디겠어요. 원주에 내려가서 선생님한테 하소연을 할 수밖에. 내가 잘못 시작한 게 아닌가 하고...... 그런데 선생님은 많은 말씀을 안 하세요. 특히 선생님과 내 경우에는 그랬어요. 또 직설적으로 말씀도 안 하셨어요. 그저 대포집, 선술집에 가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내 고민이 저절로 풀려버리는 거야, 이 방향으로 가야겠다, 이 문제는 이렇게 대처해야겠다는 게 자연스럽게 나온단 말이지. 이것이 아직도 풀리지 않는 무위당 선생님의 신비예요.

선생님 말씀 중에 기억나는 것은 사람도 안과 밖이 분리되어 있는 건 아닌데, 있기는 있다는 말이지, 이 안팎의 조건이 형성되지 않고는 일이 이루어질 수 없다, 상황, 조건, 여건이 조성이 되어야 일이 된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느긋하게 생각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선생님이 내 과거를 잘 아시니까 서울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화운동 쪽으로 가버리면 절대 돌아올 수 없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죠.

그리고 지금까지 원주의 경험들을 원용을 해라 하셨어요. 바로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함께 일을 논의해 나가는 경험 말이죠. 마을에 가서 어떤 일을 할까, 어떤 방법으로 할까 계획을 세워 스스로 협동체를 구성하는 데까지 어떤 마을은 6개월도 걸리고, 어떤 마을은 한두달 걸리지만,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경험이다. 협동조합도 마찬가지고... 서울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야 하고 그런 사람들과 논의를 해나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일이 당위로만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원주의 경험을 살려 사람들을 만나고 분위기를 형성하면 일이 좋은 형태로 발전될 수 있지 않겠느냐, 기반이 형성되지 않은 곳에 가서 아무리 안타까워하고 조바심을 낸다고 해서 일이 되는 게 아니라고 격려하셨죠.

윤형근 : 무슨 일이나 마찬가지지만 한살림의 처음 시작은 황무지에 나무를 심는 기분이셨을 것 같아요. 그래도 사회적으로 인식이 확산되고 한살림에 대한 이해가 넓혀지면서 운동의 지평을 넓히고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박재일 : 그때는 동료나 후배, 선배들이 하나둘씩 찾아주고 같이 한두시간 이야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었죠. 서울에서는 농촌이 어떻게 되어가고, 매일 대하는 밥상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생각들을 하지 않았어. 기회 있을 때마다 내가 몸으로 겪어왔고, 보아왔던 우리의 농사를 짓는 방식이나 우리의 삶의 모습들을 이야기하니까 듣는 사람들은 기절초풍을 하는 거야.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들과 만났죠. 세월이 가면서 관심을 가져주고 한 살림 운동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가니까 참 반갑더라구요.

그런데 이 일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정말 필요하고 소용되는 일이라면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필요로 하는 사람들 스스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관심있는 분들과 같이 협동조합을 만들게 된 것이죠. 1987년부터 뜻을 가진 소비자 분들이 준비를 했어. 그때까지 제기동 쌀가게 한살림농산을 거쳐간 사람들이 1500여 명 정도 되는데, 그 분들에게 협동조합을 만들겠다고 소식을 전해 1988년 4월 21일 70여 명의 조합원들이 모여 한살림 공동체소비자협동조합을 창립했죠. 한살림이 생활협동운동 틀을 갖게 된 의미있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생존의 필수조건인 농을 생태적이고 협동적으로 살려내어, 그 농산물을 농촌과 도시의 생활자들이 같이 연대해서 본격적으로 만들어가게 된 것이죠. 도시의 생활자들은 유정란 하나를 먹으면서도 건강한 밥상을 위해 애쓰는 생산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고마워하고, 또 생산자들은 소비자들이 안심하고 밥상을 차리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 농사짓고 생산하는 것에 보람을 느끼게 된다 말이죠. 구체적으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소재로 해서 서로 고마워하면서 생활이 달라지고 또 이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게 된 것이죠. 게다가 좋은 것 먹게 된 것을 그저 고마워만 했는데, 이 일을 통해서 논이나 밭, 물 등 생태계가 살아난다는 것도 알게 되고....

한편 무위당 선생님과 주변 사람들이 힘이 되어주셨던 것이 농촌과 도시가 서로 나누는 운동이 기본이지만, 이 운동이 단순히 물건을 나눠먹는 차원에서만 그쳐서는 안되고, 우리의 생각과 관계의 내용을 바꾸는 것으로 가야 한다, 이야기를 나눈 것이었어요. 그래서 사회 전체가 서로 나누는 삶을 지향하는 길을 가야 하지 않으냐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살림연구회를 꾸려 1년 여 준비를 해서, 1989년 10월에 한살림모임을 창립하고 우리 운동의 지향과 내용을 밝힌 한살림선언을 발표했죠. 그게 큰 힘이었어. 자네도 거기 참여했지만.... 한살림농산이나 조합이 재정이 탄탄했다면 이런 일을 펼쳐나가는 데 뒷받침이 될 텐데..... 그게 아니더란 말이지. 심지어 무위당 선생님이 난 전시회를 열어 뒷받침을 하시는 등 큰 힘이 되어주시기도 하셨지. 모두가 모여서 같이 생각을 정리해서 우리 모두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방향과 지침을 선언에 담았지. 사회에 대해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이렇게 살자는 거였어요. 지금도 그게 지침이란 말이지. 아마 영원한 지침이 되리라고 난 생각하는데....

윤형근 : 어려움,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역사적, 사회적인 요구가 있어서 오늘 이렇게 어느 정도 기반도 갖추고 회원도 3만이 넘을 정도까지 갔는데..... 한살림모임 말씀도 하셨지만 무위당 선생님의 생각에 비추어보았을 때, 지금의 모습을 생각할 때 더 강조하고 더 해나가야 할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박재일 : 그 이야기하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어요. 무위당 선생님이나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여러 사회문제들의 원인이 무엇이냐, 사람을 존중하고 서로 관계를 회복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것이 독재 때문이냐, 그러면 민주화가 되면 해결되느냐, 독재와 관계 없이도 사람이나 마을이 다 찢어지는데.... 그러면 분단 때문이냐, 탄압 때문이냐, 가난 때문이냐... 그런 것들이 부분적인 이유는 될 수 있겠지만 그것들이 다 해결된다고 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삶과 사회가 되느냐, 이것이 우리 모두의 고뇌였어요. 이건 문명이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 결과 아니냐, 그럼 앞으로 이 문명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었지.

기술공학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을 거예요. 가령 엄청나게 쏟아지는 쓰레기를 기술공학적으로 처리하는 것에도 노력을 해야할 거예요. 하지만 결국 쓰레기를 줄이거나 발생시키지 않는 사회, 삶이 도모되지 않고는 세월이 갈수록 인간의 생명도, 생존조건도 더 심각하게 위협받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이것을 풀어내는 길은 보다 근원적인 데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에요. 무위당 선생님이 하신 말씀 중에 기억나는 것이 ‘원시반본(原始返本)인데, 근원적인 데서부터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자는 입장, 모색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차원에서 앞서 얘기한 것처럼 한살림이 초기에는 멋진 모습으로 나타났어요. 한쪽에는 생명을 존중하는 새로운 가치나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한살림모임이 창립되고, 또 한편에서는 우리 생존의 필수조건인 농을 살려나가면서 협동적으로 생산되는 농산물을 농촌과 도시의 생활자들이 같이 연대해서 만들어가면서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새로운 가치와 삶을 실천해 나가는 생활협동운동이 전개되었잖아요. 제 역할들을 해나가며 생각을 정리하고 실천을 하면서 지금 사회가 재미없다 생각했는데, 이 사회가 이렇게 되어야겠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게 재미있구나, 이런 생각과 삶의 모습들을 키워낼 수가 있었는데.....

그런데 한살림모임이 유지될 수 없어서 그걸 접었을 때 선생님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안타까워했지요. 물론 농촌과 도시의 나눔을 하면서도 모임의 부분들을 보충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생활협동운동에 전력투구하다 보니 쉽지 않았지요. 새로운 안목에서 현재 우리의 삶을 재해석하고 할 일들을 모아내고 이런 것들을 활발하게 개척해야 하는데...... 한살림모임이 유지되었다면 서로간에 큰 보탬이 되었을 텐데... 어느 면에서는 균형이 안 맞았다고 볼 수 있죠. 그게 항상 안타까웠는데...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기반이 구축되었으니, 노력을 해보자 하고 있어요. 이제부터는 잘 되지 않겠느냐 생각이 들어요.

윤형근 : 한살림모임 막바지에 제가 간사를 하다 그만두겠다고 하니까 무위당 선생님이 붙잡으셨는데.... 아마 그 일이 다시 시작되는 걸 아시면 무위당 선생님도 기뻐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짖굳은 질문일지 모르겠는데, 무위당 선생님에게 서운하신 때는 없으셨나요.

박재일 : 왜 없었겠어요. 재해대책 한참 바쁠 때는 정신없었고, 원주에 이런저런 일들이 터졌을 때, 선생님에게 출마를 하시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씀 드린 적이 두어번 있었어요. 현장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일이 안 되니까.... 지역개발 사업을 위해 갖은 고생 다했는데, 가령 소를 2년 동안 잘 길렀는데, 한우 가격이 폭락해서 소득으로 연결이 안 된다 말이지. 농산물 가격지지 정책만 제대로 된다면 힘을 받을 텐데, 그렇지 않다는 말이죠. 이건 정치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적 역량을 갖춰야 하지 않나 생각을 많이 했어요. 게다가 원주는 꽤 기반이 구축되어 다른 곳에서는 ‘원주민주공화국’이라고까지 했단 말이지. 그래서 선생님에게 출마하시라고 했더니, 막 화를 내시더라구. 너는 아직도 생각이 그것밖에 안 되느냐고 하시면서..... 그러니까 젊은 사람은 화가 나지, 답답하고..... 그래서 원주를 떠날 생각도 했었어요. 게다가 선생님은 다 끌어안으면서 가시는데, 도저히 그래 가지고는 일이 안될 것 같았거든....

윤형근 : 정치문제에 있어서 선생님이 거리를 두셨던 것은 혹시는 개인적으로 과거의 실패가 한 요인이 아니었던가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박재일 : 선생님 개인적으로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지. 우선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시지 않으신 것은 사회안전법이라는 정치적 제약이 있었고, 두 번째로는 정당정치 면에서는 진보나 새로운 세력이 발붙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이 몇 사람 앞장서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거였어요. 뿌리를 박고 사는 생활인들이 하는 삶의 운동이 되야 하지 않겠느냐, 이게 아니고는 길이 없다라고 선생님은 보신 것 같아. 그래서 내가 뜨려고 하면 주저앉히고, 주저앉히고 하셨던 것 같아요. 물 속에 잠수해서 기어라고까지 말씀하시면서.....

선생님이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러셨느냐, 아니에요. 지난 소식지에도 나왔지만 공무원이면 공무원이 할 수 있는 일, 관청에 찾아오는 민초들을 친절하게 자상하게 보살피는 일을 일러주셨지요. 사람에 맞게, 분야에 맞게 오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들려주실 얘기가 있었어요.

윤형근 : 박 회장님은 주저앉히셨지만, 무위당 선생님께 정치인들도 많이 찾아오셨지요.

박재일 : 그랬지요. 따뜻하게 맞아주시는 것은 기본이었지요. 원래 삶의 기본이 그러셨으니까요. 계산을 하거나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일러주시고, 잘한 일이 있으면 등을 두들겨주시고.... 이런 것들이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었지. 선생님이 소용된다면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다 한 셈이죠. 원주 봉산동에 계시면서 모든 운동을 하신 것이지.

윤형근 : 마지막으로 무위당 선생님을 기리는 모임에 바라는 얘기를 들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박재일 : 우선 젊은 후배들이 모여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니까 고맙고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리는 모임은 다른 기념사업회 등과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선생님을 선전하거나 알리는 것이 아니라 무위당 선생님의 생각, 바라시던 삶의 모습, 사회적인 관계, 사람이나 사물을 대하는 모습들을 생각하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할 거예요. 그리고 그런 귀한 생각을 사회에 전달하는 역할도 필요하겠죠. 사람들이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 모색하는 데 힘이 될 수 있게 말이죠.

오늘 내가 선생님에 대해 얘기는 했지만, 이건 선생님의 한 부분일 거야. 장님 코끼리 만지기를 한 것이지. 무위당 선생님과 함께 하셨던 여러분들과 온전한 선생님의 생각과 모습을 찾고 나누는 일이 필요할 거예요. 그런 것들이 정리되어 책으로 엮어졌으면 해요.

이전에 이영희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무위당 선생님의 족적이 담긴 소박한 기념관이 만들어졌으면 해요. 봉산동이라도. 함께 모여 담소도 나눌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거창하게 할 필요는 없어요. 그저 선생님의 모습대로....

윤형근 :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며칠을 두고 들어도 다 듣지 못할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회장님이 지금 하시는 일 속에 무위당 선생님이 살아계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일이 제대로 되어간다면 아마 선생님도 기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장시간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생산과 소비는 하나다

인터뷰/ 강연 2011.09.14 16:48 Posted by "한살림답게!" 인농박재일 한살림연합소식

 

박재일

 * 이 글은 2003년 11월 박재일 선생이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 생산과 소비는 하나다

한살림 운동을 시작한지 어느덧 17년이 됐습니다. 이 운동을 시작하게 된 동기를 먼저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처음엔 어떻게 하면 농산물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소비가 뒷받침 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이 길을 모색하다보니까 농산물 거래라는 게 딱 걸립디다. 시장에 가보니까 도저히 그게 안 된다는 게 느껴진 거죠. 이걸 할 수 있는 일은 도시 사람들과 농촌 사람들이 기존 농사 방식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즉 소비자에게는 어떤 농산물이 공급되어야 하는가, 생산자는 소비자에게 필요한 농산물을 어떻게 생산하고 또 농산물의 정당한 가격 실현은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는가를 서로 공유하고 문제가 있으면 서로 의견을 모아 해결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기존의 관행으로는 도저히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직접 만나서 문제를 풀어가자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직거래를 생각한 것인데,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개념이 정확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직거래라고 했을 때 그것도 결국은 사고판다는 개념이 들어 있는 것인데, 제가 생각한 것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딱 나눠진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의 전체와 인간관계를 바꿔내자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시장에서는 농산물뿐만 아니라 다른 공산품도 마찬가지로 인간관계는 모두 팔고 사는 관계뿐입니다. 이렇게 했을 때는 경제적인 관계밖에 없기 때문에 서로 이해가 상반됩니다. 소비자는 보다 싸게 사려하고 생산자는 보다 비싸게 팔려고 합니다.

결국 둘 중에 하나는 손해를 보게 되는 거죠. 이런 대립관계가 한참 가면 어떻게 하든지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서 내 이익을 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돼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밥상을 살리는 일이 이렇게 대립적인 관계로는 불가능합니다. "소비자의 밥상살림과 농업살림은 둘로 나눠진 대립 관계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즉, '생산과 소비가 하나'라는 관점에서 출발했을 때 필요한 것을 서로 협력해서 만들어 낸다"는 거죠. 그래서 저희들은 농산물 직거래 운동, 도농 간 삶의 연대, 공동체운동 등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같이 모여서 생산자는 밥상을 살리고 생태계를 살리고 땅도 살리는 생명의 농업, 즉 유기농업 운동을 해나가고 소비자는 그 운동이 지속되고 확장될 수 있도록 소비를 책임짐으로써, 농업도 지키고 건강한 밥상도 지키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서 바로 밥상살림과 농업살림을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역할을 나눠서 하는 것이죠. 농민 생산자는 생산, 소비자는 소비 역할을 동시에 나눠서 하는 것이죠.

  ■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주인으로 참여하는 한살림운동

이런 생각을 갖고서 농산물 직거래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서울에서 86년 12월 4일 동대문구 제기동에 '한살림농산'이라고 직판장을 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준비를 철저히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때는 지금과 같은 회원제 운영도 아니었습니다. 직판장에다 생산물 갖다 놓고 지나가는 손님들에게 우리는 이러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이렇게 생산을 한 것이니까 자유롭게 이용하시라는 정도였습니다.

20평되는 점포를 임대해서 시작했는데 한 일주일 있어도 사람들이 안 와요. 그냥 왔다가는 사람에게 한살림을 시작한다는 홍보물을 주니까 관심 있는 분들은 오기도 오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이상하다 생각하고 들어오기도 하는데, 물건을 보면 얼굴빛이 달라지는 거예요. 배추를 벌레가 먹어 구멍이 뻥뻥 뚫려 있으니 쳐다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놓고 파니까 '참 웃기는 놈들도 다 있다'는 표정으로 외면해 버리고 말더군요.

이렇게 처음엔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운동을 해 오면서 사람들에 대해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바쁜 세상이고 삭막하게 돌아가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정말로 사람이 뭔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운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뜻밖에 참 많았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손님이 뜸하긴 했지만 저희의 참뜻을 이해하기도 하고 좋은 의견도 나누면서 한두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일 년 반쯤 지나니까 매장을 거쳐 간 사람들이 한 1,500 세대, 그 가운데 지속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10% 정도 되었습니다.

한 달에 한번 오는 사람도 꽤 있었습니다. 그때 저희들이 직판장에 공급한 물품은 쌀을 중심으로 해서 한 열 가지 밖에 안 되었습니다.

 계속 하다보니까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의견들이 모아졌습니다. 이 운동을 어떻게 하면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다 협동조합방식이 떠오른 것이죠. 그래서 이름을 '한살림공동체 소비자협동조합'으로 했다가 '한살림 생활협동조합'으로, 그리고는 지금의 '사단법인 한살림'이 됐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협동조합방식의 한살림운동은 영리를 추구하는 조직이 아닙니다. 한살림운동은 우리의 밥상과 농업을 살리고 나아가 온 누리의 생명을 살리는 운동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선 기초적으로 먹을거리와 밥상을 살리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현재 한살림은 밥상을 차리는 소비자와 생산하는 생산자가 같이 주인으로 참여해 함께 운동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생산하는 생산자 회원, 소비하는 소비자 회원이 다 같이 회원으로 참여해 같이 꾸려나가는 형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보장한다.

 농산물을 다루다 보니 이런 문제가 있습디다. 예를 들어 쌀을 생산하다보면 생산자는 보통 9월이나 10월초에 수확을 합니다. 몇 가마를 수확하든 생산하면 이를 일거에 팔아야 영농비와 생활비에 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밥상 차리는 소비자가 일 년 먹을 밥상을 하루아침에 차리고 364일은 밥상 차리지 않아도 된다면 몰라도 그럴 수가 없는 거죠. 생산은 일시에 되는데 소비는 일 년 내내 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제 생산한 쌀을 누가 보관하고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저희는 이 문제를 초기에는 생산자 회원들이 해결했습니다. 수확이야 한 번에 하지만 관리는 일 년 내내 해야 되니까 고생이 많죠. 그러나 꾸준하게 소비만 되면 힘든 것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죠. 

저희들이 추구하는 바는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보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생산은 계획생산을 하고 소비는 책임소비를 해나가는 역할과 관계를 설정했습니다. 이런 관계와 목표를 정하고 회원들이 모여 일을 시작했는데 그러다 보니 일단 물건이 올라오면 대금을 빨리 생산자에게 보내줘야 할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 자금을 어떻게 조달을 할 것이냐가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이를 좀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돈은 필요하지만 돈 가치가 사람가치보다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가치, 생명가치가 위에 있고 그 다음에 경제 가치는 이의 보조 수단이 되는 관계로 생각을 한 것이죠. 우선 회원이 되려면 자금을 출연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출자라고 하는데, 맨 처음에는 5만원을 투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은 3만원을 출자합니다. 그렇게 해서 모인 자금은 물품구입, 사무실 얻는 돈, 배달차량 구입, 기타 사업을 위해 필요한 재정으로 쓰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협동조합을 만든 게 88년 4월 21일이었습니다. 그때 참여한 회원 수는 70여명이었고 모인 돈은 약 78만원이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죠. 지금 현재 회원 수는 매년 늘어나 2003년 11월말 현재 서울에만 4만9천 세대(전국적으로는 7만3천여 세대)가 되었습니다. 이 회원들이 출자해서 모은 돈은 45억 정도에 이릅니다. 출자금에 제한은 없지만, 회원이 되려면 3만 원 이상의 출자금은 내야 합니다. 출자금이기 때문에 서울에 살다가 이사를 간다든지 외국으로 이민을 간다든지 해서 탈퇴를 하게 되면, 출자한 돈을 환불을 해 드립니다.

그리고 1년 동안 살림살이를 꾸린 후에 매년 결산 총회를 하는데 차량비, 인건비 등 운영비와 모임이나 산지 방문 등 행사하는데 드는 비용 등 전체 예산을 다 제하고 남은 돈은 다시 회원들에게 배당을 합니다. 완전히 공개하는 거죠. 이렇게 해서 필요한 자금은 충당을 하고 다음 해의 생산과 소비 계획을 짭니다. 생산계획을 예로 들면 쌀농사는 가을에 추수하고 12월 중에 생산자와 소비자가 같이 모여 의논을 합니다.

증가한 회원 수를 감안하여 내년도엔 쌀 소비량이 몇 천 가마가 될 것인지 계산을 합니다. 그게 곧바로 생산계획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생산계획량을 생산자 회원들이 의논을 해서 산지를 배정하고 계획생산을 합니다. 일 년이 지나 수확한 쌀을 도시에 있는 소비회원들이 책임소비를 합니다. 그런데 계획한대로 책임소비가 딱딱 들어맞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동안 여러 사정이 생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3천 가마 예상했는데 살림살이를 해보니까 2천9백 가마만 소비를 할 수도 있고, 또 거꾸로 농사가 안 되어서 2천9백 가마 밖에 생산을 못해 100가마가 모자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합니다만, 모든 물품이 다 그렇습니다. 

17년 전에 출발했을 때는 10개 품목밖에 안되었지만 현재는 생산력도 높아졌고 품질도 높아져 많이 발전했습니다. 처음 3~5년 계속 노력을 해오다 보니까 다행스럽게도 땅도 살아나고 생산도 증가됩디다. 그런걸 보면

좋은 사람들과 맺은 관계가 가장 큰 힘

인터뷰/ 강연 2011.09.14 16:40 Posted by "한살림답게!" 인농박재일 한살림연합소식

[ 살리는 사람을 찾아서 | 사단법인 한살림 박재일 회장 ]

좋은 사람들과 맺은 관계가 가장 큰 힘

 

글 김선미 사진 류관희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요즘 무슨 일해요?”부터 묻는다. 나는 “살림해요”라고 답한다. 그러면 더 이상 질문이 이어지지 않는다. 대개 ‘집에서 살림한다’는 말을 ‘일하지 않고 쉰다, 논다’는 뜻으로 생각한다. 사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대답은 “한살림해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살림깨나 한다는 소리처럼 들려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한다. 살림은 ‘죽임’의 반대말이다. 그래서 살림한다는 말은 생활 속에서 무엇이든 온전히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다. 실제로 잘 못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꾸 힘주어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살림하는 나는 하루에 두 번, 모두 다섯 컵의 쌀을 씻는다. 이렇게 해서 한 달 동안 우리 부부와 중학생 두 딸이 집에서 먹는 유기농 쌀이 16kg 정도, 일 년이면 대략 두 가마 반 분량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008년 우리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이 75.8kg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부족한 양이라고 느낀다.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책임진다’는 생협의 약속을 생각하면, 과연 나는 자식처럼 쌀을 길러주는 생산자를 책임지는 자세로 소비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치지 않고 쌀을 길러내는 농민은 그 쌀을 먹는 소비자의 생명 뿐 아니라 논에서 사는 숱한 생물들도 지키면서 지구의 온실가스도 줄이고 있다는 것까지 떠올리면, 문득 매일의 밥상에서 마주치는 쌀 한 톨 앞에서 경건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마음을 조금씩 배우고 깨우치게 한 것이 한살림이다 

그 한살림을 일궈낸 큰 살림꾼 박재일 회장을 만나러 간다. 나는 인터뷰를 위해 그의 집에서 평소대로 차린 밥 한 끼를 함께 먹고 싶다고 청했다. 살림하는 이의 입장에서 이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요구인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고집을 부렸다. ‘밥상 살림 농업 살림 생명 살림’을 내건 한살림의 큰 어른, 어떻게 그가 먹는 일상의 밥상이 궁금하지 않겠는가. 

협동으로 만들어가는 행복한 세상을 밥상에서부터

단비가 내리는 초여름 어느 날 한창 제철인 빨간 장미 화분을 사 들고 그를 찾아갔다. 공교롭게 그의 집도 잠실에 있는 장미아파트였다. 그는 1986년 원주에서 올라 온 이후로 줄곧 그곳에서 살고 있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의 숲은 빗물을 머금은 아름드리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청신했다. 도시 한복판에 이런 숲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상경했을 때만 해도 사정은 많이 달랐던 모양이다.

“원주에서 근 이십년 만에 다시 서울에 올라 왔는데 처음엔 눈도 따갑고 아주 힘들었어요.”

그는 이 집에서 시작한 서울살이로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공기의 질보다 더한 것은 문화적 충격이었다.

“바로 옆집 하고 벽 두께가 이렇게 얇은데, 서로들 친하게 지내지도 않는 게 참 이상했어요. 아주 커다랗지만 모두가 한집에 사는 건데 말이죠.”

  그는 아파트를 한집살이라고 했다. 온 우주의 생명이 한집살이를 하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한살림 운동을 시작한 사람다웠다.  

현재 전국 19개 지역에서 18만 세대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살림은 1986년 12월 4일 서울 제기동에서 ‘한살림농산’이라는 스무 평 남짓한 쌀가게로 출발했다. 당시 쌀가게의 문을 연 박재일은 나이 쉰 살을 앞에 두고 뒤로는 딸을 다섯이나 둔 어깨 무거운 가장이었다. 고향인 경북 영덕에 계신 노모는 서울대학교까지 나온 똑똑한 아들이 독재정권에 쫓겨 다니다 감옥살이까지 하더니, 한동안 원주에서 교사도 하고 재해대책사업과 협동조합 운동으로 뿌리를 박는가 싶어 잠시 안도했었다. 그런데 다시 서울에 올라가 ‘쌀 팔고 계란 파는’ 일을 벌인다고 여간 낙담하시지 않았다. 그를 맞은 서울 친구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87년 6월 항쟁을 전후로 한 격동의 시절, 서울에 온 박재일은 최루탄이 난무하는 거리로 나서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묵묵히 쌀가게의 석발기를 돌렸다. 하루하루 농약을 치지 않고 길러 낸 귀한 쌀에 섞인 작은 돌 알갱이를 골라내는 것이 그에게는 수행과 같았을 것이다. 젊은 시절 그에게 익숙한 몸짓과 습관은 자꾸 거리로 달려 나가려고 했다. 물론 아주 외면하지는 못해 거리에 나서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이러다가는 영원히 쌀가게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고 쌀가게를 지켰다. 원주에서 쌀가마니를 지고 상경할 때 품었던 생각은 눈앞의 정치를 바꾸는 일보다도 어쩌면 훨씬 더 원대한 것이었다. 

폭력은 독재권력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 크고 위험한 폭력이 우리 삶을 위협하는 밥상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무렵 한 해 1,500명 가량의 농민들이 농약중독에 쓰러져 목숨을 잃는 것을 지켜보았다. 농부들이 돌보던 땅과 물도 마찬가지였다. 병든 땅에서 길러낸 먹을거리가 다시 사람을 병들게 하는 악순환을 어떻게든 벗어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미룰 수도 망설일 수도 없는 절박함이 이미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도시와 농촌이 유기농산물 직거래를 통해 공생을 모색하는 일을 공감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심지어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그는 “우리를 이용해먹는 거 아닌가, 자기 사업을 하려는 거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눈초리도 있었다며 웃었다.  

어차피 누군가 먼저 가시덤불을 헤쳐 나가는 않는다면 새로운 길이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혼자 앞서 걸어가는 사람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그로 하여금 몰이해와 냉소, 그로부터 비롯되었을 외로움을 고스란히 감내하고 이겨내도록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원주에 있는 동안 농촌에서 사람들이 서로 협동하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면서 같이 일궈내는데 그 일들이 참 잘됐어요. 그때 저렇게 협동을 하면 참 재밌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겠구나 느꼈죠.”

그는 1972년 남한강 유역의 대홍수로 삶의 터전이 쓸려 내려간 수재민들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당시 천주교 원주교구의 재해대책본부 활동으로 함께 했던 사회개발사업과 가톨릭농민회의 경험이었다. 지학순 주교를 중심으로 무위당 장일순 선생과 함께 원주 사람들이 일구어 낸 재해대책 사업은, 전쟁 이후 소위 동냥하듯 ‘밀가루 신자’를 만들어내던 이전의 구호 사업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수재민들 스스로 자긍심을 가지고 자립의 기반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늘이 스스로를 돕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이때의 가슴 벅찬 경험들이 협동조합 운동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그는 원주에서의 추억을 더듬는 동안 얼굴에 화색이 돌고 목소리도 생기가 더해졌다.

사실 그는 지난 겨울 위암 수술을 마치고 치료 중에 있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 대화를 청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의 몸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샘솟는 것 같았다. 협동으로 일궈낸 행복한 세상에 대한 꿈이 그의 힘이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협동조합운동에 대한 불신이 만연해 있었고, 은연중에 국민성 때문이라고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도 많아서 힘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체험한 희망의 증거들이 있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우리가 왜 이런 일들을 하는지 제대로 알려내고, 교육하고, 투명하게 공개하기만 하면 사람들 사이에는 믿음이 생기죠. 협동은 그 믿음의 힘으로 커져가는 거예요.” 

한살림도 모든 것을 조합원들에게 다 드러내놓기 때문에 신뢰를 얻은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도 똑같은 월급 받고 일하고, 나 먹을 것은 매장에 가서 조합원들하고 똑같이 돈 내고 사먹는 것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도 있어요.”라면서 웃는다.

사회제도를 바꾼다고 하루아침에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의 가치관이 변하고 살아가는 방식부터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는데 왼손잡이가 오른손잡이 되기 힘든 것처럼 생각의 틀과 생활 습벽을 바꾸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활 속에서 누구나 공감하는 절실한 문제로부터 출발하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고 한살림의 뜻이었다.

“그게 밥 아닙니까. 어느 누구도 피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 게 밥이잖아요. 그러니 그 안에서 밥과 세상과 사람들의 관계로부터 시작한 거예요. 우리가 제대로 된 생명의 밥상을 차리자 그래서 가정의 밥상 들판의 밥상 도시의 밥상 사회의 밥상을 다시 꾸리자고 말이죠. 그런데 의외로 좋은 생각을 가지고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는 오늘의 한살림을 만든 것은 생명의 밥상을 차리려고 노력한 엄마들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어떤 당위나 거창한 무엇을 내걸고 한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스스로 깨닫고 시작한 일이라 꾸준히 지속된 것이라는 말이다.

병은 나를 깨우치게 한 스승이다

그의 건강과 관련해서는 선뜻 이야기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최근 한살림의 조합원이 급격히 늘고 있는 데에는 식품 안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영향도 있을 것이다. 특히 아토피로 고생하는 아이들이나 암에 걸린 사람들이 먹을거리를 통해 보다 근원적인 치료를 하고자 찾아온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한살림과 함께 20여 년을 함께 살아 온 그가 병에 걸린 일을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일 유기농 먹을거리를 시장에서 상품으로 파는 기업체라면 이를 숨기고 싶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진솔하게 이야기했다. 

“요새는 채식을 중심으로 양도 적게 먹어요. 그동안 내 자신이 너무 나를 돌보지 않고 건방진 삶을 살았구나하고 이번 기회에 많이 배우게 되었어요.”

어린 아이처럼 밝은 표정이었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얼굴은 조금 야위었을 뿐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피부가 맑았다. 그는 위를 다치고 나서야 비로소 위장의 기능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너무 많이 먹었다는 것, 그리고 어떻게든 몸이 신호를 보냈을 텐데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자신에게 무관심했다는 데에도 생각이 미쳤다. 젊은 시절부터 집에서는 하숙생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일에 쫓겼고 늘 밖에서 음식을 사먹는 경우가 많다보니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고 한다. 또 농민들과 어울려 마음을 터놓고 일을 해야 하다 보니 자연 술을 마실 기회도 많았다고 한다.

“저는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잘 먹었어요. 그러면서 한살림운동을 열심히 해서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먹더라도 모두가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하루 빨리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만 했어요.”

정작 자기 몸에 좋은 것을 골라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따로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한살림운동이 지향해온 일관된 생각이다. 그는 한살림이 물품 가운데 물을 취급하지 않는 원칙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조합원들 사이에는 좋은 물을 공급해달라는 요구들은 끊임없이 있었어요. 하지만 도저히 수돗물을 못 먹겠는 사람들이라면 개인적으로 형편껏 생수를 사먹으면 돼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모두가 먹는 수돗물을 안전하게 먹을 수 있을까 노력하는 데 힘을 쏟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한살림이 나만 잘 먹고 잘 살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거든요(한살림은 1999년 수돗물불소화반대국민연대에도 참여했다).”

더불어 그는 건강이란 단지 먹을거리만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을 둘러싼 물과 공기 같은 환경과 무수히 많은 관계들이 유기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한살림을 통해 이 세상에서 정말 좋은 사람들과 기분 좋게 만나고 관계를 맺은 것이 이제껏 잘 살게 해준 힘이었어요”

그가 하는 이 간단한 말이 어쩐지 깨달은 이의 게송처럼 들려왔다.

“결국 건강문제는 자초한 거지요. 오히려 내 몸에 제대로 관심을 갖지 않은 것에 대해 반성하고 있어요.”

그의 스승이었던 무위당 장일순은 “병은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라 친구처럼 내 몸에 잘 모시고 가야 하는 것”이라고 했었다. 이제 박재일도 제 몸의 병을 스승으로 모실 줄 알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그와 함께 나눈 밥상은 예배를 보는 경건한 자리였다.

“제대로 차근차근 씹다보니 맛도 새롭게 느끼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먹는 음식에 대해 생각이 깊어져요.”

그래서 하루 세 끼 그에게 밥상을 차려주는 아내에게 더욱 감사한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다섯 자매를 반듯하게 키워 온 사람이었다. 문득 박재일은 어떤 아버지이고 남편이었을까 궁금했다.

“늘 인자하고 좋은 모습뿐이었죠.”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이 거의 없던 늘 바쁜 아버지였기 때문이라고, 서운함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육아와 살림살이에 지친 아내가 하소연을 할 때면 늘 “여보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당신을 힘들게 해서 그래요.” 하면서 다독여주었다고 한다. 그 힘으로 용기를 얻었다고. 조직 안에서 어려운 문제가 생겨도 “쳐서 내치는 것보다 끌어안으면서 시정해 가려고 노력한다”는 그의 성품을 다시 확인하게 해주는 말이었다.

국어사전을 펼쳐 살림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한 집안을 이루어 살아가는 일 또는 살아가는 상태나 형편’이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한 집안’의 의미를 가정과 사회, 사람과 자연까지 모두 아우른 온 우주로 확장시킨 것이 바로 한살림 운동일 것이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몸에서부터 다시 한살림을 하고 있었다. 꿈을 꾸는 머리와 따뜻하게 사람을 품는 가슴 뿐 아니라 하루하루 밥을 삼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인체의 기관들도 한 사람의 몸속에서 함께 살림을 해나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다.

“한살림은 끝없이 만들어가는 거예요. 완성된 게 아니라 생활하는 사람들이 하루하루 삶을 통해서 만드는 거지요.”

그 역시 오늘도 자기 몸에서부터 다시 한살림을 만들고 있었다.

《살림이야기》제05호 2009년 여름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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