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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강연

생산과 소비는 하나다

박재일

*이 글은 2003년 11월 박재일 선생이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생산과 소비는 하나다

 

한살림 운동을 시작한지 어느덧 17년이 됐습니다. 이 운동을 시작하게 된 동기를 먼저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처음엔 어떻게 하면 농산물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소비가 뒷받침 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이 길을 모색하다보니까 농산물 거래라는 게 딱 걸립디다. 시장에 가보니까 도저히 그게 안 된다는 게 느껴진 거죠. 이걸 할 수 있는 일은 도시 사람들과 농촌 사람들이 기존 농사 방식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즉 소비자에게는 어떤 농산물이 공급되어야 하는가, 생산자는 소비자에게 필요한 농산물을 어떻게 생산하고 또 농산물의 정당한 가격 실현은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는가를 서로 공유하고 문제가 있으면 서로 의견을 모아 해결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기존의 관행으로는 도저히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직접 만나서 문제를 풀어가자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직거래를 생각한 것인데,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개념이 정확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직거래라고 했을 때 그것도 결국은 사고판다는 개념이 들어 있는 것인데, 제가 생각한 것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딱 나눠진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의 전체와 인간관계를 바꿔내자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시장에서는 농산물뿐만 아니라 다른 공산품도 마찬가지로 인간관계는 모두 팔고 사는 관계뿐입니다. 이렇게 했을 때는 경제적인 관계밖에 없기 때문에 서로 이해가 상반됩니다. 소비자는 보다 싸게 사려하고 생산자는 보다 비싸게 팔려고 합니다.

결국 둘 중에 하나는 손해를 보게 되는 거죠. 이런 대립관계가 한참 가면 어떻게 하든지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서 내 이익을 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돼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밥상을 살리는 일이 이렇게 대립적인 관계로는 불가능합니다. "소비자의 밥상살림과 농업살림은 둘로 나눠진 대립 관계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즉, '생산과 소비가 하나'라는 관점에서 출발했을 때 필요한 것을 서로 협력해서 만들어 낸다"는 거죠. 그래서 저희들은 농산물 직거래 운동, 도농 간 삶의 연대, 공동체운동 등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같이 모여서 생산자는 밥상을 살리고 생태계를 살리고 땅도 살리는 생명의 농업, 즉 유기농업 운동을 해나가고 소비자는 그 운동이 지속되고 확장될 수 있도록 소비를 책임짐으로써, 농업도 지키고 건강한 밥상도 지키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서 바로 밥상살림과 농업살림을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역할을 나눠서 하는 것이죠. 농민 생산자는 생산, 소비자는 소비 역할을 동시에 나눠서 하는 것이죠.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주인으로 참여하는 한살림운동

 

이런 생각을 갖고서 농산물 직거래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서울에서 86년 12월 4일 동대문구 제기동에 '한살림농산'이라고 직판장을 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준비를 철저히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때는 지금과 같은 회원제 운영도 아니었습니다. 직판장에다 생산물 갖다 놓고 지나가는 손님들에게 우리는 이러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이렇게 생산을 한 것이니까 자유롭게 이용하시라는 정도였습니다.

20평되는 점포를 임대해서 시작했는데 한 일주일 있어도 사람들이 안 와요. 그냥 왔다가는 사람에게 한살림을 시작한다는 홍보물을 주니까 관심 있는 분들은 오기도 오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이상하다 생각하고 들어오기도 하는데, 물건을 보면 얼굴빛이 달라지는 거예요. 배추를 벌레가 먹어 구멍이 뻥뻥 뚫려 있으니 쳐다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놓고 파니까 '참 웃기는 놈들도 다 있다'는 표정으로 외면해 버리고 말더군요.

이렇게 처음엔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운동을 해 오면서 사람들에 대해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바쁜 세상이고 삭막하게 돌아가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정말로 사람이 뭔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운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뜻밖에 참 많았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손님이 뜸하긴 했지만 저희의 참뜻을 이해하기도 하고 좋은 의견도 나누면서 한두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일 년 반쯤 지나니까 매장을 거쳐 간 사람들이 한 1,500 세대, 그 가운데 지속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10% 정도 되었습니다.

한 달에 한번 오는 사람도 꽤 있었습니다. 그때 저희들이 직판장에 공급한 물품은 쌀을 중심으로 해서 한 열 가지 밖에 안 되었습니다.

 계속 하다보니까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의견들이 모아졌습니다. 이 운동을 어떻게 하면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다 협동조합방식이 떠오른 것이죠. 그래서 이름을 '한살림공동체 소비자협동조합'으로 했다가 '한살림 생활협동조합'으로, 그리고는 지금의 '사단법인 한살림'이 됐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협동조합방식의 한살림운동은 영리를 추구하는 조직이 아닙니다. 한살림운동은 우리의 밥상과 농업을 살리고 나아가 온 누리의 생명을 살리는 운동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선 기초적으로 먹을거리와 밥상을 살리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현재 한살림은 밥상을 차리는 소비자와 생산하는 생산자가 같이 주인으로 참여해 함께 운동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생산하는 생산자 회원, 소비하는 소비자 회원이 다 같이 회원으로 참여해 같이 꾸려나가는 형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보장한다.

 

농산물을 다루다 보니 이런 문제가 있습디다. 예를 들어 쌀을 생산하다보면 생산자는 보통 9월이나 10월초에 수확을 합니다. 몇 가마를 수확하든 생산하면 이를 일거에 팔아야 영농비와 생활비에 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밥상 차리는 소비자가 일 년 먹을 밥상을 하루아침에 차리고 364일은 밥상 차리지 않아도 된다면 몰라도 그럴 수가 없는 거죠. 생산은 일시에 되는데 소비는 일 년 내내 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제 생산한 쌀을 누가 보관하고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저희는 이 문제를 초기에는 생산자 회원들이 해결했습니다. 수확이야 한 번에 하지만 관리는 일 년 내내 해야 되니까 고생이 많죠. 그러나 꾸준하게 소비만 되면 힘든 것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죠. 

저희들이 추구하는 바는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보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생산은 계획생산을 하고 소비는 책임소비를 해나가는 역할과 관계를 설정했습니다. 이런 관계와 목표를 정하고 회원들이 모여 일을 시작했는데 그러다 보니 일단 물건이 올라오면 대금을 빨리 생산자에게 보내줘야 할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 자금을 어떻게 조달을 할 것이냐가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이를 좀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돈은 필요하지만 돈 가치가 사람가치보다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가치, 생명가치가 위에 있고 그 다음에 경제 가치는 이의 보조 수단이 되는 관계로 생각을 한 것이죠. 우선 회원이 되려면 자금을 출연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출자라고 하는데, 맨 처음에는 5만원을 투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은 3만원을 출자합니다. 그렇게 해서 모인 자금은 물품구입, 사무실 얻는 돈, 배달차량 구입, 기타 사업을 위해 필요한 재정으로 쓰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협동조합을 만든 게 88년 4월 21일이었습니다. 그때 참여한 회원 수는 70여명이었고 모인 돈은 약 78만원이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죠. 지금 현재 회원 수는 매년 늘어나 2003년 11월말 현재 서울에만 4만9천 세대(전국적으로는 7만3천여 세대)가 되었습니다. 이 회원들이 출자해서 모은 돈은 45억 정도에 이릅니다. 출자금에 제한은 없지만, 회원이 되려면 3만 원 이상의 출자금은 내야 합니다. 출자금이기 때문에 서울에 살다가 이사를 간다든지 외국으로 이민을 간다든지 해서 탈퇴를 하게 되면, 출자한 돈을 환불을 해 드립니다.

그리고 1년 동안 살림살이를 꾸린 후에 매년 결산 총회를 하는데 차량비, 인건비 등 운영비와 모임이나 산지 방문 등 행사하는데 드는 비용 등 전체 예산을 다 제하고 남은 돈은 다시 회원들에게 배당을 합니다. 완전히 공개하는 거죠. 이렇게 해서 필요한 자금은 충당을 하고 다음 해의 생산과 소비 계획을 짭니다. 생산계획을 예로 들면 쌀농사는 가을에 추수하고 12월 중에 생산자와 소비자가 같이 모여 의논을 합니다.

증가한 회원 수를 감안하여 내년도엔 쌀 소비량이 몇 천 가마가 될 것인지 계산을 합니다. 그게 곧바로 생산계획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생산계획량을 생산자 회원들이 의논을 해서 산지를 배정하고 계획생산을 합니다. 일 년이 지나 수확한 쌀을 도시에 있는 소비회원들이 책임소비를 합니다. 그런데 계획한대로 책임소비가 딱딱 들어맞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동안 여러 사정이 생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3천 가마 예상했는데 살림살이를 해보니까 2천9백 가마만 소비를 할 수도 있고, 또 거꾸로 농사가 안 되어서 2천9백 가마 밖에 생산을 못해 100가마가 모자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합니다만, 모든 물품이 다 그렇습니다. 

17년 전에 출발했을 때는 10개 품목밖에 안되었지만 현재는 생산력도 높아졌고 품질도 높아져 많이 발전했습니다. 처음 3~5년 계속 노력을 해오다 보니까 다행스럽게도 땅도 살아나고 생산도 증가됩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