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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강연

좋은 사람들과 맺은 관계가 가장 큰 힘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요즘 무슨 일해요?”부터 묻는다. 나는 “살림해요”라고 답한다. 그러면 더 이상 질문이 이어지지 않는다. 대개 ‘집에서 살림한다’는 말을 ‘일하지 않고 쉰다, 논다’는 뜻으로 생각한다. 사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대답은 “한살림해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살림깨나 한다는 소리처럼 들려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한다. 살림은 ‘죽임’의 반대말이다. 그래서 살림한다는 말은 생활 속에서 무엇이든 온전히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다. 실제로 잘 못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꾸 힘주어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살림하는 나는 하루에 두 번, 모두 다섯 컵의 쌀을 씻는다. 이렇게 해서 한 달 동안 우리 부부와 중학생 두 딸이 집에서 먹는 유기농 쌀이 16kg 정도, 일 년이면 대략 두 가마 반 분량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008년 우리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이 75.8kg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부족한 양이라고 느낀다.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책임진다’는 생협의 약속을 생각하면, 과연 나는 자식처럼 쌀을 길러주는 생산자를 책임지는 자세로 소비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치지 않고 쌀을 길러내는 농민은 그 쌀을 먹는 소비자의 생명 뿐 아니라 논에서 사는 숱한 생물들도 지키면서 지구의 온실가스도 줄이고 있다는 것까지 떠올리면, 문득 매일의 밥상에서 마주치는 쌀 한 톨 앞에서 경건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마음을 조금씩 배우고 깨우치게 한 것이 한살림이다 

 

그 한살림을 일궈낸 큰 살림꾼 박재일 회장을 만나러 간다. 나는 인터뷰를 위해 그의 집에서 평소대로 차린 밥 한 끼를 함께 먹고 싶다고 청했다. 살림하는 이의 입장에서 이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요구인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고집을 부렸다. ‘밥상 살림 농업 살림 생명 살림’을 내건 한살림의 큰 어른, 어떻게 그가 먹는 일상의 밥상이 궁금하지 않겠는가. 

 

 

협동으로 만들어가는 행복한 세상을 밥상에서부터

 

단비가 내리는 초여름 어느 날 한창 제철인 빨간 장미 화분을 사 들고 그를 찾아갔다. 공교롭게 그의 집도 잠실에 있는 장미아파트였다. 그는 1986년 원주에서 올라 온 이후로 줄곧 그곳에서 살고 있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의 숲은 빗물을 머금은 아름드리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청신했다. 도시 한복판에 이런 숲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상경했을 때만 해도 사정은 많이 달랐던 모양이다.

 

“원주에서 근 이십년 만에 다시 서울에 올라 왔는데 처음엔 눈도 따갑고 아주 힘들었어요.”

 

그는 이 집에서 시작한 서울살이로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공기의 질보다 더한 것은 문화적 충격이었다.

 

“바로 옆집 하고 벽 두께가 이렇게 얇은데, 서로들 친하게 지내지도 않는 게 참 이상했어요. 아주 커다랗지만 모두가 한집에 사는 건데 말이죠.”

 

그는 아파트를 한집살이라고 했다. 온 우주의 생명이 한집살이를 하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한살림 운동을 시작한 사람다웠다.  

현재 전국 19개 지역에서 18만 세대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살림은 1986년 12월 4일 서울 제기동에서 ‘한살림농산’이라는 스무 평 남짓한 쌀가게로 출발했다. 당시 쌀가게의 문을 연 박재일은 나이 쉰 살을 앞에 두고 뒤로는 딸을 다섯이나 둔 어깨 무거운 가장이었다. 고향인 경북 영덕에 계신 노모는 서울대학교까지 나온 똑똑한 아들이 독재정권에 쫓겨 다니다 감옥살이까지 하더니, 한동안 원주에서 교사도 하고 재해대책사업과 협동조합 운동으로 뿌리를 박는가 싶어 잠시 안도했었다. 그런데 다시 서울에 올라가 ‘쌀 팔고 계란 파는’ 일을 벌인다고 여간 낙담하시지 않았다. 그를 맞은 서울 친구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87년 6월 항쟁을 전후로 한 격동의 시절, 서울에 온 박재일은 최루탄이 난무하는 거리로 나서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묵묵히 쌀가게의 석발기를 돌렸다. 하루하루 농약을 치지 않고 길러 낸 귀한 쌀에 섞인 작은 돌 알갱이를 골라내는 것이 그에게는 수행과 같았을 것이다. 젊은 시절 그에게 익숙한 몸짓과 습관은 자꾸 거리로 달려 나가려고 했다. 물론 아주 외면하지는 못해 거리에 나서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이러다가는 영원히 쌀가게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고 쌀가게를 지켰다. 원주에서 쌀가마니를 지고 상경할 때 품었던 생각은 눈앞의 정치를 바꾸는 일보다도 어쩌면 훨씬 더 원대한 것이었다. 

 

폭력은 독재권력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 크고 위험한 폭력이 우리 삶을 위협하는 밥상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무렵 한 해 1,500명 가량의 농민들이 농약중독에 쓰러져 목숨을 잃는 것을 지켜보았다. 농부들이 돌보던 땅과 물도 마찬가지였다. 병든 땅에서 길러낸 먹을거리가 다시 사람을 병들게 하는 악순환을 어떻게든 벗어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미룰 수도 망설일 수도 없는 절박함이 이미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도시와 농촌이 유기농산물 직거래를 통해 공생을 모색하는 일을 공감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심지어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그는 “우리를 이용해먹는 거 아닌가, 자기 사업을 하려는 거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눈초리도 있었다며 웃었다.  

어차피 누군가 먼저 가시덤불을 헤쳐 나가는 않는다면 새로운 길이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혼자 앞서 걸어가는 사람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그로 하여금 몰이해와 냉소, 그로부터 비롯되었을 외로움을 고스란히 감내하고 이겨내도록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원주에 있는 동안 농촌에서 사람들이 서로 협동하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면서 같이 일궈내는데 그 일들이 참 잘됐어요. 그때 저렇게 협동을 하면 참 재밌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겠구나 느꼈죠.”

 

그는 1972년 남한강 유역의 대홍수로 삶의 터전이 쓸려 내려간 수재민들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당시 천주교 원주교구의 재해대책본부 활동으로 함께 했던 사회개발사업과 가톨릭농민회의 경험이었다. 지학순 주교를 중심으로 무위당 장일순 선생과 함께 원주 사람들이 일구어 낸 재해대책 사업은, 전쟁 이후 소위 동냥하듯 ‘밀가루 신자’를 만들어내던 이전의 구호 사업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수재민들 스스로 자긍심을 가지고 자립의 기반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늘이 스스로를 돕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이때의 가슴 벅찬 경험들이 협동조합 운동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그는 원주에서의 추억을 더듬는 동안 얼굴에 화색이 돌고 목소리도 생기가 더해졌다.

 

사실 그는 지난 겨울 위암 수술을 마치고 치료 중에 있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 대화를 청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의 몸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샘솟는 것 같았다. 협동으로 일궈낸 행복한 세상에 대한 꿈이 그의 힘이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협동조합운동에 대한 불신이 만연해 있었고, 은연중에 국민성 때문이라고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도 많아서 힘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체험한 희망의 증거들이 있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우리가 왜 이런 일들을 하는지 제대로 알려내고, 교육하고, 투명하게 공개하기만 하면 사람들 사이에는 믿음이 생기죠. 협동은 그 믿음의 힘으로 커져가는 거예요.” 

 

한살림도 모든 것을 조합원들에게 다 드러내놓기 때문에 신뢰를 얻은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도 똑같은 월급 받고 일하고, 나 먹을 것은 매장에 가서 조합원들하고 똑같이 돈 내고 사먹는 것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도 있어요.”라면서 웃는다.

 

사회제도를 바꾼다고 하루아침에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의 가치관이 변하고 살아가는 방식부터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는데 왼손잡이가 오른손잡이 되기 힘든 것처럼 생각의 틀과 생활 습벽을 바꾸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활 속에서 누구나 공감하는 절실한 문제로부터 출발하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고 한살림의 뜻이었다.

 

“그게 밥 아닙니까. 어느 누구도 피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 게 밥이잖아요. 그러니 그 안에서 밥과 세상과 사람들의 관계로부터 시작한 거예요. 우리가 제대로 된 생명의 밥상을 차리자 그래서 가정의 밥상 들판의 밥상 도시의 밥상 사회의 밥상을 다시 꾸리자고 말이죠. 그런데 의외로 좋은 생각을 가지고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는 오늘의 한살림을 만든 것은 생명의 밥상을 차리려고 노력한 엄마들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어떤 당위나 거창한 무엇을 내걸고 한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스스로 깨닫고 시작한 일이라 꾸준히 지속된 것이라는 말이다.

 

 

병은 나를 깨우치게 한 스승이다

 

그의 건강과 관련해서는 선뜻 이야기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최근 한살림의 조합원이 급격히 늘고 있는 데에는 식품 안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영향도 있을 것이다. 특히 아토피로 고생하는 아이들이나 암에 걸린 사람들이 먹을거리를 통해 보다 근원적인 치료를 하고자 찾아온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한살림과 함께 20여 년을 함께 살아 온 그가 병에 걸린 일을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일 유기농 먹을거리를 시장에서 상품으로 파는 기업체라면 이를 숨기고 싶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진솔하게 이야기했다. 

 

“요새는 채식을 중심으로 양도 적게 먹어요. 그동안 내 자신이 너무 나를 돌보지 않고 건방진 삶을 살았구나하고 이번 기회에 많이 배우게 되었어요.”

 

 

어린 아이처럼 밝은 표정이었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얼굴은 조금 야위었을 뿐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피부가 맑았다. 그는 위를 다치고 나서야 비로소 위장의 기능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너무 많이 먹었다는 것, 그리고 어떻게든 몸이 신호를 보냈을 텐데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자신에게 무관심했다는 데에도 생각이 미쳤다. 젊은 시절부터 집에서는 하숙생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일에 쫓겼고 늘 밖에서 음식을 사먹는 경우가 많다보니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고 한다. 또 농민들과 어울려 마음을 터놓고 일을 해야 하다 보니 자연 술을 마실 기회도 많았다고 한다.

 

“저는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잘 먹었어요. 그러면서 한살림운동을 열심히 해서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먹더라도 모두가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하루 빨리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만 했어요.”

 

정작 자기 몸에 좋은 것을 골라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따로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한살림운동이 지향해온 일관된 생각이다. 그는 한살림이 물품 가운데 물을 취급하지 않는 원칙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조합원들 사이에는 좋은 물을 공급해달라는 요구들은 끊임없이 있었어요. 하지만 도저히 수돗물을 못 먹겠는 사람들이라면 개인적으로 형편껏 생수를 사먹으면 돼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모두가 먹는 수돗물을 안전하게 먹을 수 있을까 노력하는 데 힘을 쏟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한살림이 나만 잘 먹고 잘 살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거든요(한살림은 1999년 수돗물불소화반대국민연대에도 참여했다).”

 

더불어 그는 건강이란 단지 먹을거리만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을 둘러싼 물과 공기 같은 환경과 무수히 많은 관계들이 유기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한살림을 통해 이 세상에서 정말 좋은 사람들과 기분 좋게 만나고 관계를 맺은 것이 이제껏 잘 살게 해준 힘이었어요”

 

그가 하는 이 간단한 말이 어쩐지 깨달은 이의 게송처럼 들려왔다.

 

“결국 건강문제는 자초한 거지요. 오히려 내 몸에 제대로 관심을 갖지 않은 것에 대해 반성하고 있어요.”

 

그의 스승이었던 무위당 장일순은 “병은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라 친구처럼 내 몸에 잘 모시고 가야 하는 것”이라고 했었다. 이제 박재일도 제 몸의 병을 스승으로 모실 줄 알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그와 함께 나눈 밥상은 예배를 보는 경건한 자리였다.

 

“제대로 차근차근 씹다보니 맛도 새롭게 느끼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먹는 음식에 대해 생각이 깊어져요.”

 

그래서 하루 세 끼 그에게 밥상을 차려주는 아내에게 더욱 감사한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다섯 자매를 반듯하게 키워 온 사람이었다. 문득 박재일은 어떤 아버지이고 남편이었을까 궁금했다.

 

“늘 인자하고 좋은 모습뿐이었죠.”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이 거의 없던 늘 바쁜 아버지였기 때문이라고, 서운함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육아와 살림살이에 지친 아내가 하소연을 할 때면 늘 “여보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당신을 힘들게 해서 그래요.” 하면서 다독여주었다고 한다. 그 힘으로 용기를 얻었다고. 조직 안에서 어려운 문제가 생겨도 “쳐서 내치는 것보다 끌어안으면서 시정해 가려고 노력한다”는 그의 성품을 다시 확인하게 해주는 말이었다.

 

국어사전을 펼쳐 살림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한 집안을 이루어 살아가는 일 또는 살아가는 상태나 형편’이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한 집안’의 의미를 가정과 사회, 사람과 자연까지 모두 아우른 온 우주로 확장시킨 것이 바로 한살림 운동일 것이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몸에서부터 다시 한살림을 하고 있었다. 꿈을 꾸는 머리와 따뜻하게 사람을 품는 가슴 뿐 아니라 하루하루 밥을 삼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인체의 기관들도 한 사람의 몸속에서 함께 살림을 해나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다.

 

“한살림은 끝없이 만들어가는 거예요. 완성된 게 아니라 생활하는 사람들이 하루하루 삶을 통해서 만드는 거지요.”

 

그 역시 오늘도 자기 몸에서부터 다시 한살림을 만들고 있었다.

 

김선미 사진 류관희

 

《살림이야기》제05호 2009년 여름호.  살림이야기 홈페이지 바로가기 www.salimstor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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