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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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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살림답게 -인농 박재일 선생 1주기 추모 도서 오른쪽 하단 풀스크린 버튼(네모 상자)를 클릭하면 전체 화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는 인농 박재일 선생 1주기를 맞은 지난 2011년 8월 인농기념사업위원회에서 펴낸 추모 도서입니다. ·펴낸이 인농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 이상국 ·위원 곽금순 김민경 박현선 이경국 이병철 이호열 윤형근 조희부 ·펴낸날 2011년 8월 16일 ·기획·편집 도서출판 한살림 한살림답게! ‘한살림답게!’는 2008년 한살림 가을걷이 행사 때 방명록에 박재일 회장이 쓴 말입니다. 이 말은 이듬해 한살림의 중점 활동목표 ‘한살림답게! 사회와 함께!’의 연원이 되었습니다.
인농 2주기 추모영상
생명을 지키는 살림살이 강원도 김화의 어느 농민은 요즈음 고민에 빠져 있다. 아버지와 싸워가며 농약을 치지 않고 벼농사를 지었으나 쌀이 팔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벼가 95% 정도 익었을 때 수확했다. 이 때 수확한 벼가 가장 밥맛이 좋다. 물론 벼가 완전히 익었을 때 수확했다면 수확량이 5%나 더 증가할 뿐만 아니라 쌀의 모양도 꽉 찬 듯이 보여 팔기가 쉬웠을 것이다. 땅을 살리고 먹거리를 살리기 위해 이렇게 농사를 지었는데 웬걸 소비자가 알아주지 않는 것이다. 낱알이 왜 이렇게 싸라기 같느냐, 왜 색깔이 누렇느냐 하며 외면해 버린 것이다.황토에서 누런 쌀이 나올밖에... 그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집부리며 농사지었던가 하고 후회가 되었다. 전남 광주의 한 농민은 지난 해 밭에서 썪어가는 무를 보고 속을 태워야만 했다. 무..
지금, 인농을 생각합니다 8월 19일은 故 박재일 한살림 명예회장의 10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한살림의 시작인 서울 제기동 한살림농산에서 석발기를 돌리던 청년 박재일에서 한살림 회장을 역임하고 생을 마칠 때까지. 박재일 회장은 한살림 살림꾼으로 한살림을 아끼며 온 힘을 다했습니다. 그 분의 뜻은 지금까지 한살림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한살림은 즐겁게 하는 것”이라는 고인의 말은 자칫 가치와 의미의 무게에 눌려 무거워 질 수도 있었던 한살림운동에 활력을 불어 넣었습니다. 박재일 회장은 본인을 추모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을 분입니다. 그렇지만 박재일 회장 개인이 아닌, 박재일 회장이 펼친 한살림운동을 기억하기 위해 한살림 살림꾼 박재일 회장을 추억하는 마음을 나누려고 합니다. 추모의 글도 좋고 박재일 회장과 함께 한 추억을 나누어주..
"한살림은 재미있게 하는 거야!" -인농선생 2주기 인농 박재일 선생 2주기 이야기마당과 2주기 추모식이 지난 8월 17일(금) 서울 중구 명동 서울YWCA대강당과 진행되었다. 8월18일(토) 충북 괴산군 청천면 인농선생 묘역에서 진행되었다. 지난 8월 17일(금), 오후 5시부터 서울 YWCA 대강당에서는 한살림연합 인농기념사업위원회 주관으로 인농 박재일 선생 2주기를 맞아 한살림운동의 나아갈 방향에 의견을 교류하는 이야기마당이 열렸다. 이날 이야기미당에는 전국 회원조직에서 한살림 생산자, 조합원 실무자 등 150여 명이 참석해 2시간 반 남짓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이 날 행사는 인농기념사업위원장이기도 한 이상국 한살림연합 상임대표의 인사말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상국 대표는 인농 선생 2주기를 맞아 슬픔이나 추모의 마음을 품기보다는 그 분을 우리 안에 ..
인농 박재일 선생 연보 1938년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사암2구에서 태어남 1959년 2월 경북고등학교 졸업 1960년 3월 서울 문리대 지리학과 입학 1964년 한일협정 반대시위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등과 함께 시위 주도 계엄령 발동, 도피생활 시작 1965년 3월 이옥련 여사와 결혼 1965년 한일수교협정이 조인되고 반대시위가 격화되면서 구속 1969년 8월 김지하 시인의 권유로 원주로 내려가 장일순 선생을 만나고 진광중학교 영어교사가 됨 1971년 진광중학교 내의 협동교육연구소에 합류하고 학교내 신협 창립에 참여 1972년 8월 집중폭우로 남한강 일대 대홍수가 벌어져 수재민을 지원하기 위한 사회개발사업에 동참 1973년 가톨릭농민회에 참여 1981년 재해대책 실무자들과 일본생협, 생활클럽, 대만 원주민소협 등 방문 ..
한살림 박재일 선생 그는 이 땅의 큰 농부였다. 살림의 오롯한 한 길에서 스승 무위당과 함께 을 만들고 자신과 온 세상을 갈아 생명의 큰 밥상을 마련했다. 그의 뜻은 이제 여럿이 함께 걷는 큰 길이 되었다. 생명과 이웃에 한없이 겸손했던 그는 “한살림답게”라는 말과 함께 의 영원한 벗이다. 2011년 8월 19일 일주기에 선생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 충북 괴산군 청천면 묘소에 세운 비석에 새긴 글입니다.
언제나 생명 가진 모든 존재와 함께 박재일 회장이 들려주는 무위당 이야기 이 글은 2002년 당시 모심과살림연구소 윤형근 사무국장이 무위당 선생과 함께한 ‘원주시절’에 대해 박재일 선생과 대담한 내용으로, 소식지에 실렸던 것입니다. 윤형근 : 『나락 한알 속의 우주』나 『노자이야기』와 같은 이야기 속에서 저희 젊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무위당선생님은 생명사상을 실천하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인데요. 하지만 생명사상이 나오기까지는 오랜 활동의 경험과 고뇌가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박재일 회장님께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신용협동조합운동, 농민운동, 원주교구 사회개발위원회의 지역사회개발운동, 가톨릭농민회, 원주소비자협동조합, 한살림 활동 등 무위당 선생님과 보조를 같이 하면서, 무위당 선생님이 나타나지 않고 물러서 계시는 입장이라면, 박 회장님..